필모그래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4월 개봉예정) <클로버필드 10번지>(4월 개봉예정)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 <인터스텔라>(2014) <라이프 오브 파이>(2012)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 <프로메테우스>(2012) <어벤져스>(2012) <소셜 네트워크>(2010) <인셉션>(2010) <킥애스: 영웅의 탄생>(2010)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아이언맨>(2008) <300>(2006)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2005) <악마 같은 여자>(2001) 외 다수
과장을 보태자면, 박지훈 번역가는 한국영화 번역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1997년, 박지훈 번역가는 IMF 경제위기 당시 영상번역회사를 운영하던 지인을 통해 <쉬리>(1998)의 영문 번역을 맡게 된 걸 계기로 영화 번역을 시작했다. “해보니 적성에 잘 맞았”고 이후 미로비젼,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등에서 한국영화를 해외 수출용으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일을 찾기 위해 번역물을 출력해 들고 다니며 배급사 문을 두드리던 그는 컬럼비아 트라이스타의 배급작 <악마 같은 여자>를 번역할 기회를 얻어냈다. 그 뒤 본격적으로 주요 직배사의 외화 번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른바 영화 번역 2세대라 불린다.
-20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영화 제작 방식이 크게 바뀌었는데 번역 일엔 어떤 영향이 있었나.
=현업 영화 번역가들 중 동판, 레이저, 디지털 자막 시대를 다 겪은 사람은 나뿐일 거다. (웃음) 동판 자막을 만들던 때엔 시사를 한 뒤 테이프에 소리만 녹음한 걸 들고 와 번역했다. 지금은 없어진 동판 자막 회사 씨네메이트에서 자막을 찍고, 그 자막을 입힌 버전으로 다시 내부 시사를 한 뒤 최종 수정버전을 넘기면 끝이었다. 번역 과정은 점점 단출해졌고, 요즘은 해상도를 굉장히 낮춘 흐릿한 화면을 보면서 일하는데 시나리오만 보고 하는 것과 영화를 보면서 하는 건 꽤 차이가 크다.
-직배사 영화 위주로 일을 해서인지 보안이 철저한가보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같은 경우는 전부 검정 화면이고 인물들의 입만 보였다. 목소리와 말투로 무슨 상황일지 짐작해가면서 번역했다. <아바타>(2009)도 개봉하기 전날 영화를 처음 봤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철저히 보안을 지키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건 소리도 못 듣고 시나리오만으로 번역했다. 마블 스튜디오도 보안에 민감한 편이다.
-직배사의 일년치 라인업을 미리 통보받나.
=직배사 영화들은 연초에 대강의 라인업이 나오니까 그걸 귀띔해주는 정도다. 직원들도 어떤 영화가 언제 개봉할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 일정에 맞춰서 중간에 작은 영화가 들어오면 한다. 한달에 서너편 정도 하는 것 같다. 지금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영화는 내가 다 하고 있고, 다른 직배사 영화도 거의 맡고 있다.
-외국어 실력은 물론, 문장력, 해당 문화권과 타깃 관객층에 대한 이해까지 요구되겠다.
=나는 번역이 경험과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창조한다기보다 정해진 것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다. 물론 어떤 능력들은 필요하다. 영어 번역은 회화를 얼마나 잘 구사하느냐가 중요하다. “right?”라고 말하는 것이 억양에 따라 동의를 구하는 표현일 수 있고, 비아냥일 수도 있다. 또 부모들이 애들을 재울 때 “see you in the morning”이라고 한다. 대개의 번역은 “아침에 보자”라고 해석하는데 나는 그냥 “잘 자”라고 쓴다. 직역하면 틀린 거지만 의미는 그거잖나. 단어를 많이 알고, 해석을 잘하는 것보단 구어적 표현을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문화권과 시대에 대한 배경은 인터넷만 봐도 대강 알 수 있다. <스파이 브릿지>(2015)의 1960년대를 나 역시 살아본 적 없지만 할리우드의 상업영화들은 세계 시장을 타깃으로 삼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아주 낯선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니까 어느 정도의 자료로도 충분하다.
-영화의 무드에 따라 스타일과 표현을 달리하기도 하겠다.
=액션, 스릴러는 조사를 생략하는 편이다. 긴박하고 간결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말투도 “실례할게요” 대신 “실례 좀” 하는 식으로 어미를 자른다. 영화가 건조하고 삭막하게 흘러가면 나도 자연스럽게 던지듯이 대사를 쓰게 되더라. 캐릭터에 따라서도 물론 다르다. 경찰들이 “발포!”라고 한다면, 갱들은 “갈겨!”라고 하겠지.
-미리 세계관을 숙지해둬야 하는 영화의 경우는 따로 공부를 하나.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한다고 해서 틈나는 대로 이전 에피소드를 찾아보긴 했지만 깊이 공부하는 정도까진 못했다. 전문 용어가 필요한 영화는 관련 영화나 자료를 찾아본다. <마션>(2015)은 비교적 쉬운 편이었지만, <인터스텔라>를 할 땐 대본을 먼저 달라고 해서 용어를 미리 살펴봤다. 현실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니 짧은 시간에 나의 120%를 쏟는 거다.
-번역가의 권리에 대한 정리는 어떻게 되나.
=예전엔 극장용 자막만 쓰고 DVD용과 케이블용, IPTV용은 따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직배사 영화는 극장용 자막이 DVD, 블루레이에 같이 들어간다. 전엔 직배사와 얘기해서 극장용만 과격하게 쓰곤 했는데 지금은 블루레이로 출시하는 시점까지 고려한다. 직배 영화 번역물에 대해선 직배사가 그 권한을 갖는 걸로 계약서에 명시돼 있다.
-표현에 대한 배급사의 제재나 조율도 있나.
=의견을 교환하는 절차다. 회사마다 분위기의 차이도 있다. 어떤 곳은 정말 자율적으로 하게 해주고, 어떤 곳은 배급사 의견을 수용해주길 바라기도 한다. 나는 혼자 일하는 케이스라 집중하다보면 거기에 갇히게 된다. 그럴 땐 다수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방향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영화 취향도 궁금하다.
=드라마를 좋아한다. … 안 그렇게 생겼나? (웃음) 솔직히 액션이나 SF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공포영화도 싫지만 <컨저링> 같은 스릴러는 괜찮은데, 슬래셔는 정말 싫다. (웃음) 그런데 직배사 영화를 주로 하다보니 잔잔한 드라마는 잘 안 맡게 되더라. ‘맨’ 시리즈는 거의 다 내가 한 것 같다.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 가장 재밌었던 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였다.
-노련한 번역가에게도 난감한 번역이 있을까.
=보통은 코미디. 그 사회의 문화권에서나 통하는 거라서. 그렇다고 직역하면 하나도 안 웃기고, 의역하자면 너무 뜯어고치게 된다. 미국식 코미디가 그래서 어렵다. <인터스텔라>와 <그래비티>(2013)를 할 땐 천문학 용어를 어떻게 풀어써야 할지 막막했다. TV시리즈 <CSI>처럼 자막에 주석을 달아줄 순 없잖나. 관객이 딱 봤을 때 바로 알지 못할 단어를 쓰는 건 의미가 없다. 풀어쓰자니 글자 수 한계가 있고, 비슷한 용어로 대체하자니 틀렸다는 비난을 받고. (웃음) 타협점을 찾는 게 힘들다.
-번역가로서 일관된 기준이나 원칙이 있나.
=관객이 자막을 보고 있다는 것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문장이 읽혀야 하는데 중간에 ‘뭐지?’ 하고 걸리는 말이 생기면 실패다. 거창한 건 아닌데, 처음 번역을 시작할 때 선배에게 들은 말이다. ‘포르노를 번역하더라도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라.’ 최대한 쉽고 간결한 것이 좋은 번역이라고 본다.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번역과 대사
“의역과 직역 사이의 균형감이 훌륭한 김은주씨의 번역을 좋아한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2001)은 내가 원서를 읽었을 정도로 팬이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니 한글 번역이 무척 잘돼서 좋아했고, <매트릭스2 리로디드>(2003)는 대사가 정말 어려운데도 번역이 매끄럽게 잘된 편이다. <무서운 영화2>(2001)도 정말 기막히다. ‘chest’라는 단어엔 ‘작은 상자’라는 뜻도 있고 ‘가슴’이란 뜻도 있다. 여자가 ‘저 통을 좀 집어달라’며 그 단어를 말하는데, 남자가 그걸 잘못 알아듣고 여자의 가슴을 만진다. 여자는 벌컥 화를 내면서 ‘젖통 말고 저 통 달라고!’라고 하는데 그 장면이 정말 웃겼다. (웃음)”
번역 전용 프로그램
“등록된 사람만 이용 가능한 ‘에디플러스’라는 프로그램을 쓴다. 화면에 맞춰 자막이 뜨는 걸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번역가와 배급 담당자만 볼 수 있다. 지금까진 내가 다운로드 받아서 영상을 구동했는데, 앞으로는 보안을 위해 스트리밍 방식으로 바뀔 거라고 하더라. 배급사 서버로부터 영상을 불러와 스트리밍으로 보고 자막까지 전달하면 그대로 파일이 없어져버린다. 디즈니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부터 이후 작품을 전부 그렇게 공유할 거라고 했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도 그런 방식으로 작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