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고려할 게 너무 많다
2016-03-15
글 : 함혜숙 (영화번역가)
영화 번역가들이 겪는 의역과 오역 논란에 대하여
<퍼시픽 림>

2013년에 개봉한 <퍼시픽 림>의 후기들을 보다가 눈길이 가는 글이 있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의도해서 일부러 ‘cancel’이라고 표현한 걸 왜 멋대로 ‘종말을 막는다’라고 번역했나?” 이 관객이 지적한 영어 대사는 “Today we are canceling the apocalypse!”였다. 이 관객의 지적대로 감독의 의도를 존중해 사전적 의미대로 번역을 해야 할까? “종말을 취소할 것이다!” 또는 “종말을 중지할 것이다!” 영화 자막에 대한 비평글들을 보다 보면 “감독의 의도를 훼손하고 영화를 망쳤다”라고 지적하는 얘기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이 얘기와 함께 세트로 따라다니는 지적이 있다. “왜 번역가 마음대로 의역을 하는가?”

그렇다면 ‘의역’이란 무엇인가? 왜 영화를 망치는 원흉으로 종종 비난을 받을까? ‘I love you’를 ‘나는 사랑해. 너를’이라고 영어 문법 그대로 번역한다면 이것은 원문에 충실한 직역인가?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한국어 어순에 맞춰 번역하면 원문을 무시한 의역인가? 사실, 의역과 직역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다만, 여기서는 영화 번역에 국한해 관객의 입장에서 의역을 얘기해보겠다. 관객이 말하는 의역이란 ‘번역가의 의도(혹은 영화 마케팅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원문에 있던 대사가 빠진다거나 다른 표현으로 대체된다거나, 없던 표현이 추가된다거나, 혹은 완전히 한국적 정서로 번역된 자막들을 가리켜 ‘의역’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

영화를 살리는 의역, 영화를 죽이는 의역

영화사로서는 한명이라도 더 많은 관객을 사로잡기 위해 마케팅을 펼친다. 번역가는 마케팅 방향에 맞춰 번역 방향을 잡는다. 동시에, 나날이 높아지는 관객의 눈높이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럼 영화를 죽이는 의역과 영화를 살리는 의역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다시 <퍼시픽 림> 얘기로 돌아가보자. 중국에서 흥미로운 번역 논란이 있었다. 중국에서 개봉한 <퍼시픽 림>에서 예거인 ‘집시 데인저’의 필살기 ‘엘보 로켓’(elbow rocket)이 ‘페가수스 유성권’으로 번역된 것이다. ‘페가수스 유성권’은 일본 애니메이션 <세인트 세이야>의 주인공이 사용하는 기술이다. 이에 관객이 불만을 제기하자, 번역가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라서 일부러 그렇게 번역했다고 해명했다. 이는, 번역가가 감독의 의도를 과도하게 해석해 엉뚱하게 의역해서 결국 오역이 된 예이다.

워킹맘의 애환을 그린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All us working mothers feel like we’re spinning 50 plates in air at once, but Kate, you can give her ten more plates, all the size of manhole covers, and she just keeps going.”

주인공인 케이트(사라 제시카 파커)의 상황을 묘사하는 문장인데, 여기서 핵심은 “spinning 50 plates in air at once”와 “all the size of manhole covers”를 어떻게 번역하느냐다. 직역을 하면 이렇다. “워킹맘들은 접시 50개를 동시에 돌리지만, 케이트는 맨홀 뚜껑만큼 거대한 사이즈도 쉽게 돌린다.” 극장 자막은 이렇게 나갔다. “워킹맘들은 몸이 10개라도 모자란데 케이트는 일, 살림 다 잘해내는 슈퍼우먼이에요.” 여기서 원문에 ‘접시 50개’라고 나오는데 ‘몸이 10개’라고 번역하면 오역 아니냐고 지적하는 건 무의미하다. ‘맨홀 뚜껑을 돌리는 것’을 ‘슈퍼우먼’이라고 번역한 것은 원문과 다른 어휘로 대체됐지만,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의역이다. 육아와 살림, 직장일을 병행하며 고군분투하는 워킹맘의 이미지가 즉각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자막은 몇초 만에 스크린에 떴다 사라지므로 자막을 보자마자 쉽게 이해돼야 한다. 문장구조가 복잡하거나 화려한 수식어를 쓰면 자막을 따라 읽기가 벅찰 수도 있다.

<이미테이션 게임>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이야기를 다룬 <이미테이션 게임>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It’s not just a usual humdrum production mill factory… er, radio factory. It, it’s not, actually.”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은 공장을 가장한 비밀 연구소에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조안 클라크(키라 나이틀리)를 영입하기 위해 조안의 부모를 찾아가 횡설수설한다. 극장 자막은 이렇게 나갔다. “평범한 제조 공장이 아니에요. 라디오 공장인데 공장인 듯 공장 아닌….” <이미테이션 게임>은 전체적으로 무겁고 심각한 분위기인데, 조안의 부모 앞에서 말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하는 앨런의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럽게 비쳐지며 영화 분위기를 잠시 환기시킨다. 이 부분에서 유난히 빵~ 터진 관객이 있다면, 소유와 정기고가 부른 대히트곡 <썸>의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라는 가사를 떠올린 게 분명하리라. 하지만 <썸>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공장인 듯 공장 아닌’이 그저 일상적인 언어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처럼 번역가의 의도와 관객의 경험이 만나면 뜻밖의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관객의 경험이나 지식 같은 영화 외적인 요소가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혹은 반대로 반감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적절한 의역이냐를 판단할 때 관객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시대적 맥락과 국민 정서까지 감안해야

1998년에 개봉한 <벅스 라이프>의 “This is nothing compared to the Twig of 1993”이라는 대사는 “1993년 단풍 참사도 잘 이겨냈잖아”라고 번역됐다. 이 자막은 1995년의 ‘삼풍백화점 참사’를 패러디한 재치 있는 번역의 예로 종종 꼽힌다. 하지만 <벅스 라이프>가 2016년 현재 개봉됐다면? ‘단풍 참사’라는 표현이 관객에게 통했을까?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모르는 관객에게는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빗대어 ‘단풍호 참사’라고 번역한다면 재치 있는 의역으로 평가받을까? 관객은 이 자막을 보며 유쾌하게 웃을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는 전 국민에게 상처로 남았기 때문에 유쾌하게 영화를 감상할 수가 없으리라. 오히려 슬픔과 분노가 더해질 것이다. 이렇듯, 98년 당시에는 최고의 번역으로 꼽히던 자막도 시대가 달라지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적절한 의역인지를 판단할 때에는 시대적 맥락과 국민 정서까지 감안해야 한다.

결국, 영화 번역가는 마케팅과 관객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영화의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같은 의역이라도 영화 속 맥락, 시대적 맥락, 관객의 지식 수준, 타깃 관객층 등 다양한 요소들이 개입해 평가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에서 ‘덕후력’을 발휘해야 하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영화 번역가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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