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상의 논리를 찾아서
2016-03-15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정구웅

필모그래피

<소곤소곤 별>(감독 소노 시온, 작업 예정) <더 우먼 인 더 실버 플레이트>(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작업 예정) <남과 여>(2015) <이웃집에 신이 산다>(2015) <도쿄 트라이브>(2014) <고양이 사무라이>(2013) <르 아브르>(2011) 외 다수

영화 번역가 정구웅은 영화 번역 연구자이기도 하다. 고려대 불어불문학과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인데 연구 주제가 흥미롭다. 요약하면, 소설가였던 에릭 로메르는 어째서 영화감독으로 선회했는가를 통해 영상 번역과 소설 번역의 차이를 짚는 것이다. 2005년부터 일본어와 프랑스어로 된 영화의 번역을 하며 그가 초지일관 영상 번역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와도 닿아 있다. “내가 번역한 작품들은 관객이 많이 든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개성 있는 작품들이었기에 번역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작품들”이라고 그는 말한다. <도쿄 트라이브> <고양이 사무라이>를 비롯해 그가 번역한 영화들에 대해 물으며 영상 번역에 대한 그의 정돈된 생각을 들어봤다.

-상당 부분이 랩인 <도쿄 트라이브>의 대사를 음율까지 맞춰 번역해 놀라웠다.

=번역뿐 아니라 자막 작업(영화 번역과 자막 제작은 별개의 일이다. 정구웅 번역가는 자막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도쿄 트라이브>의 자막까지 만들었다. 그걸 영화에 입히는 일은 자막 코딩 전문가 박찬웅씨가 진행했다.-편집자)까지 병행해 넉달 정도 걸렸다. 자막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 했다. 음악적 리듬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운율과 음절을 거의 똑같이 맞췄다. 일본어 모음과 비슷한 한국어 모음으로 어미를 처리해 들리는 소리와 자막이 비슷하게 떨어지게 했다. 재미난 말장난, 영어 표현도 최대한 그대로 살렸고. 영화에 등장하는 팀마다 상징하는 색이 있다는 데 착안해 팀별로 자막 색깔도 다르게 했다. 자막을 보면 마치 노래방에서 가사를 따라 부를 때 색이 글자 위에 입혀지듯 흘러간다. 사전이나 문법상의 단어 쓰임에 의존했다기보다는 최대한 영화 안에 있는 요소들을 이용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직역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도쿄 트라이브>는 동료 번역가이자 수입•배급사 안다미로 윤혜진 대표의 의뢰로 번역한 걸로 안다. 영화 번역은 어떤 식으로 의뢰가 들어오나.

=2014년 겨울 도쿄에서 <도쿄 트라이브>를 봤는데 신기하게도 며칠 뒤 윤 대표의 전화를 받아 번역을 하게 됐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때 <고양이 사무라이> 번역을 했는데 그 작품을 윤 대표가 개봉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번역해달라고 연락해온 적도 있다. 한번 인연을 맺은 수입사와 계속 일하게 된다. 또 일어, 프랑스어 번역가가 많지 않아서 그쪽 일이 있다 싶으면 동료 번역가들이 나를 소개해주기도 한다. 영화제 번역은 모집 공고를 보고 시험을 쳐 일을 맡게 된다.

-<고양이 사무라이>는 번역가의 재치가 뚝뚝 묻어났다. 대표적으로 ‘いやし’를 치유가 아닌 힐링으로, ‘もえ’는 ‘심쿵’으로 번역해 무사와 고양이의 ‘귀여운’ 동거라는 극적 분위기를 살렸다.

=영화 초반 내레이션으로 무사 큐타로(기타무라 가즈키)가 ‘사정이 있어 방랑 중이지만 곧 정식무사로 복귀할 것이다.… 참고로 별자리는 처녀자리, 혈액형은 B형!’이라고 자기소개를 한다. 여기서 이미 내가 ‘심쿵’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영화임을 영화가 말해주고 있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됐을 땐 영화제쪽에서 ‘치유’라고 했지만 이후 개봉 준비하면서는 내가 애초 생각한 ‘힐링’으로 갔다. 한국에서 ‘힐링’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기도 했고. ‘심쿵’도 웹툰에서 유행하던 말이었는데 옮겨봤다.

-번역가의 개성이 드러난 번역의 예들인데. 그렇다면 작품 안에서 번역가의 목소리가 허용되는 범위는 어디까지라고 보나.

=각 작품이 번역가에게 허락해줬다고, 번역가 스스로가 판단한 범위까지가 아닐까. 그 안에서 번역가는 자신이 이해한 바를 최대한 잘 표현해내야 한다. 그 허용이 번역가의 착각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영화에 대해서 공부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작품을 잘 이해해 표현한다’는 게 감독의 의도를 읽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감독도 자신의 연출 의도를 모를 수 있잖나. 그보다는 이 작품이 어떤 면에서 다른 작품들과 다른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극의 톤을 생각해 최대한 건조하게 번역한 <르 아브르>에서 <고양이 사무라이>와 같은 말의 재미를 살릴 수는 없지 않겠나. 번역에 대한 비평이나 ‘좋은 번역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 지점에서부터 가능해질 것이다. 완벽한 오역이 아니라면 틀린, 잘못된 번역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공을 들였는데 관객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거나 눈에 잘 띄지 않아 아쉬운 번역 사례도 있겠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는 주인공이 신약성서를 다시 쓰려고 사도들을 찾아간다. 성서가 그렇듯, 영화는 관객이 보고 있는 장면이 결국 과거의 얘기였음을 말하려고 한다. 여기에 이 영화의 독특함이 있다. 과거형 문장을 구사해 넣었는데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아쉬움이 컸다. <도쿄 트라이브> 속 TV에서 지진 소식을 전하는 앵커의 말이 카메라가 멀어지면서 점점 작게 들린다. 그때 자막 크기도 점점 작아진다. 소리를 작게 한 건 분명 감독의 의도인데, 영화에서 자막의 크기는 늘 그대로라는 건 어색한 일이다.

-에릭 로메르 감독에 관한 연구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영상 번역에 집중하게 된 이유와 연결된다고 했다.

=<몽소 빵집의 소녀>(1963)를 비롯해 로메르의 영화에서는 영상이 구축한 세계와 말(대사)이 구축한 세계가 미묘하게 어긋난다. 신과 숏, 몽타주의 구성에 따라 대사에 실리는 (의미의) 하중이 달라진다. 문법과 말의 어순만을 좇아 번역하다 보면 영상의 논리를 놓치게 되니 경계해야 한다.

-작품과 관객을 잇는 징검다리 같은 번역가의 존재에 대해 첨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윤기 선생이 번역한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황현산 선생이 번역한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읽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번역본을 읽었다’는 건 생략된 채 그 책을 읽었다고만 말한다. 영화 번역도 마찬가지다. 번역가는 투명인간처럼 여겨지곤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분명히 있는) 번역가라는 존재를 한번 더 생각해볼 때 관객과 번역가 모두에게 발전적인 게 아닐까.

‘엘레냥스’ 감각있잖냥!

“관객이 좋아해주는 번역이면, 나도 번역이 잘됐구나 싶다. 작품과 번역이 잘 맞았다는 얘기니까.” 정구웅 번역가가 <고양이 사무라이>의 ‘심쿵’ 못지않게 마음에 들어 하는 번역이 있다. 같은 영화의 ‘엘레냥스’다. “일종의 ‘나이스’(nice)에 해당하는 말과 고양이의 ‘양’이 합쳐진 말을 어떻게 옮길까 고민했다. ‘좋은’의 의미와 유사한 단어를 찾다가 ‘엘레강스’(elegance)를 발견하고 고양이의 ‘양’과 결합시켰다.”

<웰컴>

이 작품, 탐나더라!

번역 의뢰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번역가에게 작품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신작 <해피 엔드>(2017)는 정말 해보고 싶다. <아무르>(2012) 번역을 하지 못해 아쉽기도 했고. 프랑스 북부 칼레 지역 이민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내가 관심 있어 하는 이슈다. 이 지역을 눈여겨보게 된 건 역시 프랑스 내 이슬람 이민자들의 현실을 그린 <웰컴>(2009)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다. 불과 몇년 사이에 영화에서 그려지는 칼레의 상황이 너무나도 참혹하게 악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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