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로 수다 떨며 늙고 싶다”
2016-03-15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황석희

필모그래피

<데드풀>(2016) <스포트라이트>(2016) <사울의 아들>(2015) <캐롤>(2015) <맥베스>(2015)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나의 어머니>(2015) <러덜리스>(2014) <셀마>(2014) <미스터 터너>(2014) <아메리칸 셰프>(2014) <와일드>(2014) <폭스캐처>(2014) <다이버전트>(2014) <노예 12년>(2013) <아메리칸 허슬>(2013) <웜바디스>(2013) <프란시스 하>(2012)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던 날 황석희 번역가를 만났다. <스포트라이트>에 작품상이 돌아간 걸 확인한 그는 “와, 대박”을 연발하며 자신이 트로피를 품은 듯 기뻐했다. 이병헌이 시상한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사울의 아들>도 그의 번역작. 두 작품을 포함해 <캐롤>과 <데드풀>까지 현재 극장에 걸려 있는 네편의 영화가 황석희 번역가의 손을 거쳤다. 특히 히어로 ‘데드풀’의 방정맞은 언행을 온전히 만끽하게 해준 자막으로, 영상 번역 경력 10년, 영화 번역 경력 3년차인 황석희 번역가는 “기적 같은 행복”을 맛보는 중이다.

-번역이 화제가 되는 경우는 드문데 <데드풀>의 경우 번역가의 노고를 치하하는 글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개봉 전 영화 커뮤니티에 올라온 <데드풀> 관련 글의 80%는 ‘자막(번역)만 잘 나오면 돼’였다. 관객이 영화 걱정은 하지 않고 번역 걱정만 할 정도로 번역에 관심이 큰 작품이었다. 네이버 <데드풀> 평점란의 첫 번째 베스트 댓글이 ‘번역가 상줘라’인데, 그 베스트 댓글에 공감 엄지가 3천여개나 달렸다. 번역가에게 그보다 큰 상이 또 있을까. 기분이 좋아서 그 댓글이 뜬 스크린숏을 계속 찍고 있다. (웃음)

-데드풀이 워낙 말 많은 캐릭터인 데다 영화 곳곳에 깨알 같은 농담이 심어져 있어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내 머릿속에 있는 가안 1번부터 10번까지 뭘 써도 욕 먹겠다 싶은 대사들이 있다. 레퍼런스 개그, 즉 고유명사를 활용한 개그들이 그렇다. <데드풀>에는 A4 한 장은 거뜬히 채울 정도로 고유명사가 많이 나온다. 그것들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번역을 했는데 그럼에도 덮을 수밖에 없는 게 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스미스 요원(제드 리스)을 데드풀이 계속 아동 성추행범으로 놀린다. 스미스 요원 역의 배우가 샌드위치 가게 ‘서브웨이’의 대변인 재러드 포글과 생김새가 비슷해서인데, 재러드 포글이 미성년자와 성행위를 한 혐의로 미국에선 크게 논란이 됐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재러드 포글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데드풀이 스미스 요원을 찾아가 복수하는 장면에서 재러드 포글의 이름과 샌드위치를 언급하는 원래 대사는 그래서 바꿔야 했다. “안녕, 로리타마니아, 재미 좀 보셨어? 잘라드릴까?”로 자막이 나갔을 텐데, 이런 건 어쩔 수 없는 경우였다. 그럼에도 <데드풀>은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 많은 영화다.

-<캐롤>과 <스포트라이트>의 경우 이전에 작업한 <인사이드 르윈>, <와일드>, <맥베스>와 마찬가지로 본인이 먼저 수입사에 영화에 대한 애정과 작업에 대한 의지를 피력한 작품이다. 그런 애정 때문인지 <캐롤>의 번역 작업은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블루레이가 출시되면 출시사에 연락해서 번역을 다시 손보고 싶다고 했는데.

=오류와 실수가 있었다기보다 번역가들이 봤을 때 눈에 걸리는 부분들이 있다. 저 문장에선 차라리 주어를 뺄걸, 어미를 바꿔서 좀더 우아하게 갈걸, 과감하게 의역해서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할걸, 같은 후회가 남았다.

-<캐롤>에선 캐롤(케이트 블란쳇)의 ‘(My angel) flung out of space’를 번역하는 데 고심했다고. 자막엔 ‘하늘에서 떨어진 (나의 천사)’라고 나왔다.

=뜻은 ‘너 굉장히 특이해’, ‘외계인 같아’인데 무척 독특한 표현이다. 원작 소설에 쓰인 문장을 영화가 그대로 가져다 쓴 대사이고. 검색해보니 전세계 <캐롤> 번역가들이 이 문장으로 고민을 많이 했더라. 그러다 트위터에서 <캐롤>의 각본가 필리스 나기의 글을 발견했다. 러시아의 <캐롤> 소설 번역가가 필리스 나기의 트위터에 ‘flung out of space’가 무슨 뜻인지 물었고 필리스 나기가 “어떤 것이 하늘에서 갑자기 툭 하고 떨어진 것”이라 답했다. 진작 발견했으면 좋았을 텐데 <캐롤> 개봉 뒤에 그 트윗을 발견했다. (웃음) 그래도 번역이 틀리지 않아 안도했다.

-캐롤과 테레즈(루니 마라)가 끝까지 서로 존대하도록 설정했다. 출간된 소설 번역과 다른 지점이다.

=테레즈와 캐롤은 백화점 직원과 손님의 관계로 만났다. 캐롤이 진상 고객이 아닌 이상 첫 만남에선 존대를 했을 거다. 이후 캐롤이 말을 놓는다면 말 놓는 타이밍을 잡아야 하는데 나로선 그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말 놓는 것도 건방진 것 같고, 여행을 떠나는 시점이나 섹스를 하고 난 다음 시점으로 잡는 것도 촌스럽게 느껴졌다. 트위터에도 썼지만, 두 캐릭터의 사회적 계급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캐롤이 특정 시점에 반말을 하면 작정하고 어린 여자한테 작업 거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 <캐롤>의 존하대 문제에 대해 트위터에 글을 쓴 건 한국어 번역서가 나오기 전의 일이다. 마치 내가 소설 번역가를 저격하기 위해 쓴 것처럼 비춰졌는데 그건 아니다. 번역가 각자의 해석이 있고, 그 해석도 존중한다.

-미드 <뉴스룸> <NCIS> <밴드 오브 브라더스>처럼 전문 영역을 다룬 작품도 다수 번역했다.

=인터넷 검색을 꽤 잘한다. (웃음) 예전에 <내셔널지오 그래픽> 번역을 1년 반쯤 했는데 그때부터 쌓은 검색 능력이 상당하다고 자부한다. 아무튼 인터넷을 통해 최대한 정보를 모은다. 전문가 커뮤니티에 질문도 남기고 메일도 보낸다. 가장 확실한 건 주변 전문가들한테 직접 물어보는 거다. <스포트라이트>의 자막도 친분 있는 기자와 변호사를 달달 볶아 완성할 수 있었고, <밴드 오브 브라더스> 때도 아는 동생인 육군 상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는 헬기 승무원이었어서, 좌로 둘백, 우로 하나백, 개활지, 효력사, 알파, 찰리 어쩌고 하는 포병들이 쓰는 용어를 전혀 모른다. 실제로도 포병이 아니면 모르는 말이지만 군사용어든 법률용어든 최대한 현장의 용어를 살려서 쓰려는 편이다. 전문가들이 봤을 때 어설퍼 보이는 것도 싫고, 요즘 관객이 그런 정확한 번역을 원하기도 하고.

-블로그에 꾸준히 번역 후기를 올린다. 무척 관객 친화적인 번역가다.

=번역가로서의 생활이 내게는 일종의 ‘덕업일치’인 셈이라 번역 작업이 끝난 다음 (블로그나 SNS를 통해) 관객과 영화에 대해 떠들고 ‘덕질’하는 게 재밌다. 만약 소통 창구를 없애버리면, 관객의 존재를 지워버리면 번역이 업으로만 남을 것이다. 또 나만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관객이 원하는 번역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겨서 더이상 번역을 못하는 그날이 올 때까지 관객과 영화로 수다 떨며 늙고 싶다.

<웜바디스>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Bitches, man”

“가장 고마운 대사,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웜바디스>의 ‘매정한 년’이다. 줄리(테레사 팔머)가 좀비R(니콜라스 홀트)을 놔두고 가버리는 장면에서 ‘Bitches, man’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걸 ‘매정한 년’으로 번역했다. 그 짧은 대사 한줄을 사람들이 많이 기억해주더라. 이후 영화사에서도 연락을 많이 받았다. 어쩌면 ‘Bitches’ 그 한 단어로 내 커리어가 시작된 거라할 수 있다.

번역가의 즐겨찾기

번역할 때 유용하게 사용하는 즐겨찾기 사이트를 공개해달라고 청했다. “일단 은어나 유행어 검색이 가능한 유명 사이트 ‘urban dictionary’가 있다. 한글 초성검색 사이트도 음차번역이나 말장난 칠 때 유용하다. 또 경찰 부호코드나 군용어가 정리된 사이트도 있고, 심지어 백악관 홈페이지도 즐겨찾기 해놓았다. 정부 기관 명칭들이 쭉 나와 있기 때문에 어느 기관이 어디 산하인지 찾을 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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