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부터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까지, 그를 본격적으로 알렸던 영화들
2016-07-18
글 : 김보연 (객원기자)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이번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전체 필모그래피를 짚어보며 새삼스럽게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 번째는 그가 연출한 작품 수가 생각보다 많다는 거였다. IMDb를 기준으로 그는 극영화-다큐멘터리, 장편-단편을 합쳐 모두 44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리고 그중 거의 절반이 우리가 ‘초기작’으로 여기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즉 키아로스타미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세계영화계에 이름을 알렸을 때 그는 이미 19편의 영화를 만든 중견 감독이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앞줄에 놓이는 (경이로운) 목록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클로즈업>(1990), <그리고 삶은 지속된다>(1992),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 <체리 향기>(1997),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1999)- 은 엄밀히 따져 그의 ‘중기’에 해당한다. 어떤 면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여전히 적게 알려진 미지의 감독인 셈이다.

두 번째 놀라움은 키아로스타미가 생각보다 많은 수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는 점이다. 물론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로 단순히 구분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가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계속해서 꾸준히 다큐멘터리를 발표했다는 건 키아로스타미에게 다큐멘터리 작업이 단순한 변덕이나 유희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어쩌면 그가 영화를 통해 추구했던 어떤 가치들의 핵심을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가정을 조심스럽게 해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키아로스타미의 많은 영화들이 다큐멘터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이제 그의 2000년대 이전 작품들을 살펴보며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이런 특징에 대해 고민해보려 한다.

논픽션이 아닐까 질문하게 만드는 장면들

돌이켜보면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거의 언제나 극영화적 순간과 다큐멘터리적 순간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비논리를 무릅쓰고 직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는 한편의 영화로 두개의 서로 다른 영화의 상(像)을 제시한 감독이었다. 물론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견고한 만듦새를 가진 ‘극영화’이다. 이 작품에서는 한편의 영화를 극영화로 구분하게 만드는 관습적인 영화적 지표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야기 구조는 보편적인 갈등 전개를 따르고 있으며, 각 숏들은 익숙한 문법으로 편집되어 있고 적절한 순간마다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는 클로즈업과 음악이 등장한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의 대표작 중 가장 친절한 영화일지도 모를 이 작품 속에도 논픽션이 아닐까 질문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있다. 특히 주인공 소년이 다른 장소로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가 그 자리에 남아 마을 주민들의 잡담을 5분 동안 보여주는 장면이 그렇다. 이 연출은 단순하게 극영화 속에 짧은 다큐멘터리 클립을 잠깐 삽입한 것이라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줄곧 소년을 쫓아가던 동선의 일관성까지 포기한 채 어떤 도드라진 순간을 만들어낸 감독의 결정은 더 많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야기 전달의 경제성을 떨어트리고 전체적인 리듬을 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이 왜 꼭 필요했던 걸까?

이런 ‘이상한’ 장면은 다른 영화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1997년작 <체리 향기>를 보자. 자신의 자살을 도와줄 조력자를 찾는 남자에 대한 이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 극영화의 일정한 규칙을 따라 흘러간다. 그런데 이야기가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키아로스타미는 다소 뜬금없이 <체리 향기>의 제작 현장을 찍은 영상을 보여준다. 방금 전까지 구덩이에 누워 있던 주인공은 한가롭게 촬영을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고, 심지어 키아로스타미가 등장해 무전기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리고 4분가량의 이 영상을 보여준 뒤에야 비로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즉, 감독은 이 장면을 보여주어야만 <체리 향기>를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이 기묘한 영화적 제스처는 키아로스타미가 픽션의 요소만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이 거의 없으며, 다큐멘터리가 담보하는 실제 현실의 어떤 조각을 영화 안으로 가져오려 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지면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쓸 수 있다. 개인적으로 키아로스타미의 세계관이 가장 밀도 높게 응축된 작품이라 생각하는 <클로즈업>은 애초에 다큐멘터리 제작과 함께 작업을 시작한 영화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가 실제 일어난 일이고 어디까지가 감독의 창작인지 의심할 때쯤 키아로스타미는 보란 듯이 주인공이 재판을 받는 실제 기록 영상을 제시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 했지만, 특히 이 영화에서 극-다큐의 구분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1992년 작품 <그리고 삶은 지속된다>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 역시 단순히 어떤 아이를 찾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관객은 이 이야기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적 성격을 가진 픽션임을 알게 된다. 영화감독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가 자신의 입으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 영화 밖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현실은 픽션의 얇은 막을 가볍게 찢고 들어온다. 그런가 하면 1999년 작품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는 어떤 동네에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온 감독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 마을의 사람들과 풍경을 논픽션의 방법으로 보여주었으며, 1994년 작품 <올리브 나무 사이로> 역시 키아로스타미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감독을 등장시켜 ‘영화 속 영화 속 영화’라는 복잡한 층을 만들어낸다. 이때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몇 장면들이 키아로스타미의 전작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건 절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영화 밖의 삶을 새롭게 보기 위하여

이때 강조하고 싶은 건 한편의 영화에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집어넣는 키아로스타미의 연출이 절대 영화로 벌이는 단순한 유희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만약 그렇다면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을 보며 받은 감동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진다). 대신 그는 한편의 영화 안에 노골적으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섞고 그 구분을 애매하게 만들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 현실의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 관객은 영화 밖에 존재하는 우리의 실제 삶을 조금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다. 결국 지금 이야기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독특한 연출은 현실을 대하는 무뎌진 감각을 다시 깨우기 위한 그만의 방법론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키아로스타미가 정말 소중한 감독이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빵과 골목>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당시 이란의 아동·청소년지능개발연구소에서 일하던 키아로스타미가 1970년에 연출한 흑백영화 <빵과 골목>(Nan va Koutcheh)이다. 현재 유튜브에서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이 10여분짜리 단편은 길을 걷는 소년과 길을 지키는 강아지, 그리고 소년이 들고 있는 빵에 대한 귀여운 이야기이다.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에 만들어진 10분짜리 단편을 보고 거장의 출현을 예감했다고 말하는 건 물론 허풍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관객이 이 영화를 키아로스타미의 작품인지 모르고 우연히 봤다 하더라도 소년과 강아지의 걸음이 만들어내는 엇박자 리듬에 경쾌한 기분을 느낄 것이라는 건 장담할 수 있다. 이미 키아로스타미는 이때부터 피사체의 단순한 움직임만으로 관객의 마음을 건드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