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텐>부터 <쉬린>까지, 디지털 세계로 이행한 키아로스타미
2016-07-18
글 : 우혜경 (영화평론가)
<쉬린>

“영화는 그리피스에서 시작해서 키아로스타미로 끝난다, 라는 고다르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05년, 한 행사에서 나온 관객의 질문에 키아로스타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드디어 이 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기쁘군요. 그 말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1)를 만든 직후 나온 것이니 벌써 6~7년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 고다르는 더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그 이후 여러 인터뷰에서 고다르가 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죠. 저는 제 영화가 이제 약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텐>(2002)이 그렇죠.”

<텐>이라는 제목의 분기점

그런데 이상하게도 키아로스타미가 세상을 떠난 직후, 그의 부고 기사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고다르의 말이 인용됐다. 키아로스타미의 대답도 십년이 훌쩍 넘었고 <텐> 이후 연출한 영화도 10여편에 달하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던 그의 영화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하다. 어쩌면 저만큼 앞서간 그를 따라잡지 못한 건 여전히 ‘지그재그 3부작’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기억 뿐인지도 모르겠다.

<텐>이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고 있지만 키아로스타미의 ‘디지털’ 시기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체리 향기>(1997)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35mm로 진행되던 영화는 자살하려던 주인공이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끝난다. 하지만 그다음, 에필로그처럼 영화 밖으로 빠져나온 카메라는 35mm가 아닌 작은 ‘캠코더’다. 절정에 달한 봄을 놓치면 꼬박 일년을 기다려야 했기에 키아로스타미는 ‘이렇게라도’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지만 우연치 않은 이 경험이 가져온 깨달음은 꽤 컸던 것 같다. <10 온 텐>(2004)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작은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은 어색해하지 않습니다. 인공적 연출 없이도 대상의 자연스러운 리액션을 얻어내 절대적 진실을 보여주는 것, 제가 지난 30년 동안 찾아왔던 것입니다.”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우간다 아이들을 촬영해달라는 국제농업개발기금의 요청으로 시작된 다큐멘터리 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이 작은 카메라가 가져온 ‘신세계’를 마음껏 탐구한다. 아이들은 카메라가 신기하고, 키아로스타미는 카메라를 불편해하지 않는 아이들을 신기해한다.

이러한 두번의 경험을 거쳐 도착한 <텐>은 차 안에 설치된 두대의 고정 카메라로 진행된다. 한대는 운전석에 앉은 주인공을, 다른 한대는 조수석에 타고 내리는 인물들을 담는다. 10개의 챕터에 걸쳐 주인공은 옆자리에 번갈아 탄 인물들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이같은 설정을 통해 키아로스타미는 대화를 하는 두 인물을 ‘숏-리버스숏’으로 쪼개는 ‘영화문법’에 의문을 제기한다. 종종 이 영화가 숏-리버스숏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잘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반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챕터10) 조수석에 탄 소년은 운전하는 엄마와 말다툼을 한다. 그런데 16분가량의 이 챕터에서 엄마를 보여주는 숏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신에서 볼 수 있는 건 소년의 ‘숏’뿐이다. 우리가 엄마의 ‘리버스숏’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사실 소년의 숏을 비집고 들어온 엄마의 ‘목소리’다. 한편 창녀를 태운 챕터7은 정반대로 진행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창녀의 ‘숏’을 볼 수 없다. 대신 그 빈자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주인공의 ‘리버스숏’으로 채워져 있다.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운전석과 조수석을 이따금씩 오가는 다른 챕터들의 경우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자동차라는 공간적 특성으로 인해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은 스쳐가듯 짧은 순간들을 제외하면 시선을 거의 주고받지 못한다.

<텐>이 ‘숏-리버스숏’에 대한 질문이었다면, 단 5개의 숏으로 이루어진 <파이브>(2003)는 (디지털)영화의 ‘시간’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데드 타임만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서사’를 없앤 다음 (서사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데드’ 타임이 과연 가능할지 살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서사 없는 화면 속에서 순수한 시간을 경험해야 하는 관객은 스스로 서사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파도에 떠다니는 나무둥치, 해변 산책로를 오가는 사람들, 바닷가를 어슬렁대는 강아지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오리 떼, 폭풍을 견뎌낸 달빛은 이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데드 타임만으로 이루어졌지만 어느 한순간도 데드 타임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 이것은 키아로스타미가 디지털을 경유해 오즈 야스지로에게 헌사를 바치는 방식이기도 하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다

이처럼 디지털 시기에 들어선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연출’이 사라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숏을 쪼개는 새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영화의 시간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키아로스타미의 이러한 질문이 디지털과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다. 또한 그가 디지털영화의 형식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질문들은 그가 영화 경력 초기부터 가져왔던 오랜 화두, 그러니까 영화가 어떻게 현실을 반영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디지털 버전’에 불과하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에서 미장센을 최대한 배제하고 비전문배우들을 통해 어떻게든 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키아로스타미는 디지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텐>의 성취에 대한 자신의 코멘터리처럼 만든 <10 온 텐>은 이렇게 발견한 ‘신세계’에 대한 그의 흥분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키아로스타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몇편의 옴니버스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거친 다음 그는 2008년 <쉬린>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12세기 페르시아 서사시 <코스로우와 쉬린>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얼굴 클로즈업만으로 진행된다. 당혹스러운 몇분이 흐르고, 키아로스타미가 결국 영화 속 영화를 보여주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부지런히 화면 밖에서 영화의 사운드와 이를 지켜보는 관객의 표정이미지를 결합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배우들이 사실 <코스로우와 쉬린>을 본 것이 아니라 키아로스타미의 작은 방에 앉아 그냥 각자 ‘슬픈 사랑 이야기’를 떠올려 연기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좀 난처해진다. 쉬린의 가혹한 운명에 눈물 흘린다고 믿었던 ‘관객’의 모습은 그렇다면 거짓인 걸까?

모두들 <쉬린>을 디지털 영화미학 속에서 설명하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키아로스타미는 이 영화를 통해 다큐멘터리보다 훨씬 더 가깝게 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극영화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탐색한다. 그는 이전과는 달리 <쉬린>에서 전문배우들을 캐스팅한다. 영화에서 배우들은 <코스로우와 쉬린>을 보며 웃고 우는 ‘관객’을 연기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허구의) 눈물 속엔 800년도 넘은 ‘쉬린’의 이야기가 여전히 공명되는, 고통스러운 이란 여성들의 삶이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더 생생하게 투영돼 있다. 더이상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현실의 벽 앞에서 키아로스타미는 허구를 다시 끌어들인 셈이다. 그가 몇번이나 반복했던 비유. “축구를 잘 모르는 제겐 축구를 보는 것보다 축구에 열광하는 관중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그는 아마 다시 다큐멘터리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이미 세상을 떠난 그에게 이제 이것은 불가능한 가정법이 되고 말았다. 그저 그가 남긴 몇편의 영화만으로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디지털 시기의 35mm, <티켓>

<텐> 이후 키아로스타미가 디지털에 매혹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 시기의 모든 영화를 디지털로 작업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에르마노 올미, 켄 로치와 함께 ‘기차’를 배경으로 한 3부작 다큐멘터리를 기획한다. 하지만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이 작품은 옴니버스 형식을 띤 장편 극영화로 바뀌게 되고, 키아로스타미는 로마행 기차에서 작은 소동을 벌이는 노부인의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에피소드를 35mm로 연출하였다. “<텐>과 <파이브>가 디지털로만 가능한 영화였다면 <티켓>의 ‘드라마’를 담아내기 위해선 35mm가 필요했다. 중요한 건 디지털이냐 35mm냐가 아니라 어떤 선택이 더 ‘현실’에 가까운가이다.” 키아로스타미의 말이다. 일본의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티켓> 중 키아로스타미가 연출한 2등석 이야기를 2000년대 베스트영화 중 한편으로 꼽았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