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그가 영화를 통해 사회에 뿌린 불안의 씨앗 - <큐브릭: 그로테스크의 미학>
2016-10-10
글 : 김보연 (객원기자)
사진 : 백종헌
<큐브릭: 그로테스크의 미학> 제임스 네어모어 지음 / 정헌 옮김 / 컬처룩 펴냄

스탠리 큐브릭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 이후 음모론자들은 이것이 TV를 통해 방영된 하나의 영화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가설을 진지하게 밀어붙인 사람들은 그 영화의 연출자로 큐브릭을 지목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짐작하건대 현실의 것이 아닌 이미지를 그렇게 실감나게 연출할 수 있는 감독으로 큐브릭보다 더 나은 사람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사람들이 큐브릭이라는 감독에 대해 갖고 있던 어떤 이미지를 추정해볼 수 있다. 큐브릭은 영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를 실제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또는 그런 완벽한 이미지의 세계를 추구한 감독이었다.

하지만 <큐브릭: 그로테스크의 미학>(2007)을 쓴 제임스 네어모어는 큐브릭의 이런 대중적인 이미지가 큐브릭에 대한 어떤 오해를 발생시킨다고 말한다. 큐브릭이 지나치게 차갑고 냉정하며, 기계적 엄밀함만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테크니션이라는 선입견이다. 큐브릭이 촬영-조명-미술-편집-사운드 등 영화 기술 분야에 있어 최고 수준의 감각과 실력을 갖춘 감독이며,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제임스 네어모어는 이런 요소만으로 큐브릭을 이해하는 건 그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부족하다고 본다.

실제로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집요한 추구라는 요소를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큐브릭의 영화들이 하나로 쉽게 묶기 힘든 다양한 면모를 동시에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편을 제외하고 13편의 장편을 연출한 그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서 우주 공간과 우주선 내부의 모습을 창백한 빛과 차가운 온도로 묘사했고 폭력 묘사로 악명 높은 <시계태엽 오렌지>(1971)에서는 광인의 광기를 팝아트와 함께 폭발시키듯 묘사했다. 그런가 하면 <배리 린든>(1975)에서는 촛불과 안개를 이용해 희뿌연 공기를 카메라로 포착했으며, 그와 대조적으로 <샤이닝>(1980)에서는 베일 듯 선명한 피사체의 윤곽을 포착했다. 이런 대조점들은 사실 그의 모든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영광의 길>(1957),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 그리고 <풀 메탈 자켓>(1987)이 각각 만들어냈던 서로 다른 느낌의 전투 장면들, 또는 이전의 어떤 영화와 비교해도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던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1999) 등을 떠올려보자. 이처럼 작품마다 다채로운 세계를 보여줬던 큐브릭의 세계를 단지 영화 기술의 탁월함과 이를 위한 엄격한 태도로만 이해하는 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때 제임스 네어모어는 큐브릭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그로테스크’를 제시한다. 영어사전은 그로테스크(grotesque)를 “1. 터무니없는, 말도 안 되는(불쾌하거나 모욕적일 정도로 이상함을 나타냄), 2. 기괴한(모습이 무섭거나 재미있게 이상함을 나타냄)”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네어모어는 제목부터 큐브릭의 영화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이상하고 무서울 정도로 기괴하다고 강조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로테스크’를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간단하게 정의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워 보인다. 네어모어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로테스크는 카니발적인 것과 공포스런 것 둘 모두에 연관된 더 넓은 범주다. 한 극단은 역겨운 희극이고, 다른 극단은 괴기스럽고 기이하고 초자연적인 것이다. (…) 그로테스크는 이중의 의미로 구조화된다.” 다시 말해, 그로테스크는 함께 묶일 일이 드문 두개의 미적 특성, 또는 정서적 효과 사이에 있는 어떤 개념이다.

위와 같은 네어모어의 설명을 읽고 나면 그로테스크야말로 큐브릭과 더할나위 없이 어울리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적으로 <시계태엽 오렌지>나 <샤이닝>의 유명한 장면들이 즉각 머릿속에 떠오른다. 특히 <시계태엽 오렌지>의 거의 모든 장면은 그로테스크를 설명하기 위한 완벽한 예다. 알렉스가 저지르는 범죄는 분명 묘사하기도 역겨운 끔찍한 행위이지만 이는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쓴 사람과 원색의 에어로빅복을 입은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다 (게다가 이때 알렉스의 범죄 도구는 사람의 몸보다 더 큰 남성 성기 모양의 조각이다). <샤이닝> 역시 마찬가지다. 피가 넘실대는 복도에 서 있는 그 유명한 쌍둥이 자매의 섬뜩한 이미지나 잭 니콜슨의 한껏 과장된 미치광이 연기는 별도의 어려운 설명 없이도 그로테스크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를 돕는다. “(<살인>의) 스털링 헤이든의 고무로 만든 어릿광대 가면”,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베니스 카니발 가면을 쓴 혼음 파티 참가자들의 전조”, “<배리 린든>에서 극도로 치장한 ‘슈발리에’” 등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큐브릭이 탄탄하게 쌓아올린 영화 세계와 그로테스크적 요소가 만났을 때, 그 강렬함은 더욱 강조된다. 큐브릭은 그렇게 자신의 영화 속에서 “반복해서 체계적 질서정연함과 공포스런 부조리함을 결합”한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건 큐브릭의 이런 특징이 단지 자극적인 충격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네어모어는 큐브릭이라는 문제적 감독이 자기 영화 속의 그로테스크적 면모를 통해 사회의 경직된 제도와 낡은 관습을 비판했다고 거의 모든 챕터마다 강조한다. 즉, 자신의 영화를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에 직접적인 논평을 가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적이건 보수적이건 간에 사회적 기준들을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 그로테스크 효과를 사용한다.” 그런 맥락에서 <큐브릭: 그로테스크의 미학>은 큐브릭이 영화를 통해 사회에 뿌린 불안의 씨앗을 연도별, 종류별로 꼼꼼하게 정리한 책으로 볼 수도 있다. ‘엄격한 테크니션’ 또는 ‘뛰어난 스타일리스트’가 아닌 다른 맥락에서 큐브릭의 영화를 바라보고 싶은 관객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은 본질적으로 풍자가다. 그의 주제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야만성이다.

연출자의 시각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시드니 루멧 지음 / 이태선 옮김 / 비즈앤비즈 펴냄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시드니 루멧의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라도 별 상관없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쉽고 재미있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 읽은 다음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글이 가장 좋은 글이라고 가정한다면, 시드니 루멧의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바로 가장 좋은 글의 완벽한 예를 보여준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1995)은 시드니 루멧 감독이 자신의 연출 경험을 바탕으로 (문자 그대로) ‘영화 만들기’(Making Movies)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이다. 일단 목차부터 단순하고 솔직하기 그지없다. “감독: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 “시나리오: 작가들은 꼭 필요한 존재인가?”, “편집실: 마침내 혼자가 되다”, “믹싱: 영화 제작에서 유일하게 지겨운 부분” 등이다. 나아가 본문에서도 시드니 루멧은 광각렌즈와 망원렌즈의 차이부터 촬영현장에서의 요령(콧대 높은 스타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법), 나아가 제작사의 고용인이자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감독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 등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들을 쭉 읽다보면 첫 번째, 영화 일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고 두 번째, 시드니 루멧의 연출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깊어지며 세 번째, 영화에 대한 없던 열정도 샘솟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추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영화에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는, 또는 있었던 관객이라면 다들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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