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이질성과 긴장의 비평적 지도 - <해방된 관객>
2016-10-10
글 : 김지훈 (중앙대학교 교수)
사진 : 백종헌
<해방된 관객> 자크 랑시에르 지음 / 양창렬 옮김 / 현실문화 펴냄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영화 우화>(2001/2011), <이미지의 운명>(2003/2014), <영화의 간극>(2011, 국내 번역본 미출간) 등 여러 저작에서 영화를 논의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그의 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반영화적이다. 랑시에르의 주장은 영화가 여타 예술들과 엄밀히 구별되는 자율적 예술이고 영화의 자율성은 영화에만 고유한 물질적, 기술적, 미학적 본성에서 비롯된다는 통념에 도전하기 때문에 반영화적이다. 영화 이론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통념을 정립하기 위한 시도였다. 1920년대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 담론은 영화의 본질을 카메라의 기계적 역량으로,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 지가 베르토프는 몽타주로, 그리고 앙드레 바쟁과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물리적 현실을 구원하거나 보존하는 사진적 본성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보다 넓은 측면에서 이 주장들은 서구의 미적 모더니즘을 규정짓는 ‘매체 특정성 테제’(medium specificity thesis)와 공명한다. 이 테제란 예술은 각각의 매체가 지닌 물질적, 기법적 속성으로 규정되며 이로써 하나의 예술은 다른 예술과 형태적, 장르적, 제도적으로 구별되고 나름의 자율성을 얻는다는 주장이다. 랑시에르는 <이미지의 운명> 3장에서 (매체 특정성 테제의 전도사로 알려진)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비판한다. 대신 랑시에르는 각각의 예술이 가시성과 말하기의 양식, 현실적 경험의 감각적 재구성을 위해 각자의 질료와 표현 양식을 교환하고 공존시키는 모순적인 실천의 장이라고 주장한다. “회화, 음악, 댄스, 영화, 조각에 공통적인 특성을 정의하는 예술 개념을 제시하는 것은 엄격히 말해서 불가능하다. 이 예술 개념은 실천이나 제작 방식이라는 의미로 이해된 예술들 사이의 분리접속(disjonction)의 개념이며, 더욱이 불안정하고 역사적으로 결정된 분리접속의 개념이다.” (164쪽)

즉 랑시에르의 영화 철학은 영화의 자율성과 영화 매체의 본성을 규명하려는 영화 이론의 흐름에 반하여 영화와 문학, 영화와 연극, 영화와 철학, 영화와 정치 사이의 다양한 대화 과정들을 조명한다. 이 대화 과정들의 역사는 랑시에르가 18세기 말 이후의 예술적 경향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제시하는 ‘미학적 체제’(aesthetic regime)의 속성들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이 체제는 예술과 삶의 구별, 예술적 표현 대상과 표현 수단의 구별, 예술들 사이의 구별이 명확했던 이전의 체제(재현적 체제)와는 다르다. 즉 ‘미학적 체제’ 안에서는 하나의 예술과 다른 예술 사이의 엄밀한 구분과 위계는 불가능하며, 여러 형태의 예술이 어떤 공통의 기획을 위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합류한다(예를 들어 기계화된 삶을 표현하기 위해 영향을 주고받았던 미래파, 구성주의 시대의 회화와 조각, 영화 등에서처럼 말이다). 예술들 사이의 상호적인 영향과 혼종성은 자연스럽게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과 모순을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랑시에르는 영화를 ‘미학적 체제’의 산물이자 이러한 체제를 이루는 예술들 사이의 충돌과 모순을 다채롭게 구현한 예술로 간주한다. 영화는 이미지의 극적 가치와 도상적 가치, 카메라의 기계적 역량과 이야기하기의 오래된 전통, 행동의 표현과 이미지 자체의 물질성 등 내부적으로 대립되는 것들의 공존과 협상을 통해 발달하고 변이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랑시에르는 영화의 특정성에 대한 사유를 거부하고, 그 대신 영화가 이러한 대립물들의 모순들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인접 예술들과 상호작용하면 서 나름대로의 내러티브와 이미지 형태를 전개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미지의 운명>에서는 영화의 시각적 순수성을 구현한 작품으로 알려진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에 대해 “영화를 문학에 가깝게 만드는 힘의 작용”(17쪽)을 부각시키고, 영화가 스스로의 이미지로 역사를 쓸 수 있음을 입증한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들)>에 대해서는 “다른 예술들의 일련의 전유”, 즉 “단어, 문장, 텍스트, 변성된 회화, 영화의 숏들의 뒤얽힘”(80쪽)에 주목한다.

영화에 대한 이러한 반본질론적 사유, 또는 영화 이론의 주요 주장들에 대한 도전적 사유는 <해방된 관객>(2008/2016)의 여러 장에서 다른 파장들로 공명한다. 1장에서는 연극을 다루기는 했지만 현대 영화 이론의 주요 문제의식이었던 관람성(spectatorship)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현대 영화 이론에서 관람성은 스펙터클과 이야기에 대한 몰입, 또는 이것들의 허구적인 면모를 식별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두기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설명되었다. 랑시에르는 대신 관람자를 “거리를 둔 구경꾼인 동시에 자신에게 제시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능동적 해석가”(25쪽)라고 주장함으로써 몰입과 거리두기의 이분법은 물론 관람자를 계몽과 각성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모더니즘적 예술 담론에 도전한다. 모더니즘 예술 담론이 특권화했던 비판적 예술에 대한 재평가는 이 책의 3장에서 이어진다. 비판적 예술은 삶과 예술 사이의 거리를 무효화할 수도 없고, 허구와 환영으로부터 거리를 둔다고 해서 삶의 모순에 대한 효과적인 통찰을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예술에 고유한 본성과 미적 효과에 집착하는 모더니즘 담론에 대한 랑시에르의 비판은 이 책의 5장에서 지속된다. 랑시에르는 사진의 고유한 권한으로 여겨졌던 ‘생각에 잠긴 이미지’(pensive image)가 사진을 넘어 영화와 비디오아트로 확산되고 변주되어온 미적 효과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효과를 창조하기 위해 개별 예술의 표현 수단들이 어우러지고 협상하는 과정을 파악하는 것이 영화와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비디오 이미지 역시 자신을 이질 발생의 장소, 즉 서로 다른 표현 체제 사이의 긴장의 장소로 만들 줄 알았다.”(179쪽) 랑시에르의 영화와 현대미술 담론은 이질성과 긴장의 단층들을 알려주는 비평적 지도다.

‘폰타이냐스 3부작’ 중 <반다의 방>. 아름다운 정물화와 제 목소리를 되찾으려는 신체들의 노력, 미학적 화해의 구현.

어긋난 우화로서의 영화

<영화 우화> 자크 랑시에르 지음 / 유재홍 옮김 / 인간사랑 펴냄

가장 쉽게 요약하자면 <영화 우화>(La Fable Cinematographique)는 영화감독과 스타일의 역사를 두 종류의 교환과 협상의 역사로 다시 쓰는 작업이다. 첫 번째는 영화의 기술적 장치(시네마토그래피)와 이야기하기의 전통(우화) 사이의 협상이다. 카메라의 기계적 눈과 몽타주는 인간의 눈이 포착하지 못하는 세계와 시공간을 자동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영화의 기술적 역량은 고대부터 이어진 이야기하기의 전통과 요구 또한 수용해야 했다. 랑시에르는 영화에서 이 두 요소의 결합이 결코 조화롭거나 유기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이야기들의 낭만주의적 왜곡에서 유래하는 후발 예술이며, 이 왜곡을 고전주의적 모방으로 이끄는 예술이다.… 영화 우화는 어긋난 우화다.” (28∼29쪽) 그래서 랑시에르는 앤서니 만과 니콜라스 레이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서사의 내적 긴장을 극대화한 두명의 감독으로 간주한다. 다른 하나는 영화가 인접 예술들과 경쟁하고 이들의 표현 양식을 포용하면서 필연적으로 남기게 되는 불순함의 흔적들이다. “영화는 스스로에게 파악될 수 있는 나름의 수단들로 자신이 펼치는 게임들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영화가 조형적 형식, 연극적 목소리와 펼치는 교환과 전환의 게임들을 통해서다.”(34쪽) 그래서 랑시에르는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와 F. W. 무르나우의 표현주의적 촬영술에 침투한 연극적 표현 요소들에 주목하고, 크리스 마르케의 에세이영화에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오랜 이분법에 도전하며, 고다르의 몽타주를 영화적 순수성의 표명이 아니라 회화, 사진, 사운드, 텍스트를 아우르는 무한한 결합 가능성의 현실화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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