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과격한 언행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해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에게 분노와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잘난 체하고 절제를 모르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르소나를 가졌다.”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예술, 기술, 전쟁>(이하 <광학적 미디어>)이라는 책의 서문 앞에는 미국의 미디어 역사학자 존 더럼 피터스가 쓴 ‘해제: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선사하는 빛의 향연’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존경과 찬사로 채워지기 마련인 해제와 달리, 존 더럼 피터스는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얼마나 유별난 캐릭터를 지닌 학자였는지 거침없이 묘사한다. 그것은 흡사 키틀러의 본격적인 글을 읽다보면 종종 발견하게 되는 독설과 비아냥을 닮아 있다. 그러나 곧 눈치채게 될 것이다. 아마도 꽤나 키틀러와 절친해 보이는 존 더럼 피터스는 키틀러의 분노와 짜증을 유발하는 언변과 행동을 지적하면서도 다음의 말을 잊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저런 것에서 지적인 가치를 걸러내야 한다. 예언자는 고국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2010년 이후 두권의 책이 번역되면서 국내에 소개된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특히 영화학에서는 다소 낯선 학자임에 틀림없다. 1943년, 독일에서 태어난 키틀러는 독문학과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82년 그는 교수 자격 취득 논문으로 <기록시스템 1800·1900>을 제출한다. 그러나 독일 내에서도 이 논문의 형식과 내용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고, 심사는 무려 2년여의 논쟁을 진행하면서 심사위원만도 열세명으로 늘어난 상태에서 통과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교수 자격 취득 논문을 써왔는데 그가 새로운 학과를 수립하려고 하거나 이미 수립해버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심사위원장 한스 마르틴 가우거). 그러한 키틀러를 큰 범주 안에서 한정하자면 그는 미디어 연구자이다. 그러나 그는 독일 미디어 이론을 대표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관점(문화 산업론)을 부정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영미권 ‘문화연구’의 관점 역시 무시한다. 존 더럼 피터스는 키틀러를 “독일 보수파로서 완전히 아우팅한 존재”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이 불편한 우파 정치학과 엘리트주의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디어 연구와 수사학은 매우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지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기록 미디어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당대의 미디어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되며, 인간을 그 미디어가 구성하는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통해 지각하고 경험하는 존재로서 한정한다. 그래서 그의 연구작업은 기나긴 미디어 역사에 천착되지만 불연속적이고 우연성의 계기 속에서 구축되는 미디어 이론이다.
그는 미디어를 크게 예술적 미디어, 아날로그 미디어, 디지털 미디어로 구분한다. 그의 첫 번째 저작 <기록시스템 1800·1900>은 낭만주의 문학의 황금기였던 1800년대의 읽기와 쓰기의 미디어 시대를 포괄한다. 그리고 1900년대는 전통적 기록체계가 붕괴하고 새로운 기술적 미디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로서 그는 문학과 철학, 물리학과 근대적 발명품들, 정신분석학과 아날로그 미디어를 폭넓게 횡단한다. 2002년 독일에서 출판된 <광학적 미디어>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조형예술과 영화의 시대에 대한 1999년 독일 베를린에서 진행된 그의 강의록이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그가 광학적 미디어로 구분하고 있는 사진과 영화, 그리고 TV에 관한 서술이지만,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지점은 그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소멸, 사회적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어떻게 고고학적 관점에서 사유하는가 하는 방법론이다.
키틀러의 사유는 디지털 전환기의 영화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변모시키고 있는가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1990년대 후반 점화된 ‘영화의 죽음’ 논쟁 이후 디지털 테크놀로지로서의 영화는 ‘공간에 기반한 시간 미디어’라는 오랜 영화적 정의를 바꾸어놓았다. 특히 컴퓨터에 의해 가능해진 버추얼한 미학과 방법론은 영화에 ‘시간을 공간화’하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가령 최근 촬영감독 에마누엘 루베스키가 작업했던 <그래비티> <버드맨> <트리 오브 라이프>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이질적 공간들을 하나의 연속된 시간 감각(롱테이크, 패스트와 슬로모션의 카메라 운동)으로 포괄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런데 사실 키틀러에게 영화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는 20세기에 연이은 승리를 만끽했지만 모든 승리는 일시적인 것이다.” 기술적 관점에서 영화는 임시적인 광학장치였으며, 화학적으로 이미지를 촬영하여 기계적으로 저장하고 재생하는 방식(필름)은 이미 처음부터 시대착오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영화라는 광학적이고도 공적인 이벤트는 TV를 거쳐 보다 사적인 미디어 환경으로 대체될 것이고, 셀룰로이드 필름 대신 10년 내 컴퓨터라는 이름의 디지털 신호처리 방식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그리고 이쯤에서 등장하는 그 특유의 냉소와 비아냥거림. “곧 컴퓨터로 수렴 될 미디어 환경에서 영화학자들은 건망증과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첨언, “앞으로 비디오 분야는 컴퓨터 기술과 접목해서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므로, 최후이자 최고의 영화감독이 된다는 진부한 꿈을 꾸느니 비디오쪽을 노리는 것이 더 유망하다”.
물론 키틀러는 영화의 예언자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의 형식원리는 변화하고 있다. 이것을 키틀러의 단언 혹은 영화주의자의 근심처럼 정말 영화의 죽음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지난 100년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적 형식과 존재를 지닌 미디어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영화라 부르며 향유하게 될 것인가.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정답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버드맨>. 이질적 공간들을 하나의 연속된 시간 감각으로 포괄하는 촬영감독 에마누엘 루베스키의 영화들.
디지털 미디어를 둘러싼 담론
<미디어 비평용어 21> W. J. T. 미첼, 마크 B. N. 핸슨 지음 / 정연심 외 옮김 / 미진사 펴냄
“‘미디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독일의 미디어 과학자인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미디어에 대한 역사적인 이론서인 <축음기, 영화, 타자기>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키틀러의 이 발언에는 중요한 주장이 담겨 있다. 미디어는 경험과 이해에 있어서 사회 전반의 기초 인프라를 구성하며 준선험적인 조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 미디어는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중재하며, 그로 인해 그러한 시공간 내에서 구체적인 경험이 가능해진다.” <미디어 비평용어 21>의 공동 편저자인 W. J. T. 미첼과 마크 B. N. 핸슨은 이 책의 서문을 위의 인용문으로 시작해 모든 것을 요약한다. 새로운 미디어가 구성하는 사회적 시스템과 시공간 경험에 관한 관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미학과 테크놀로지, 사회라는 세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장은 서로 어느 정도 관점을 공유하는 미디어 사회학자들이 쓴 짧은 키워드들에 관한 글로 채워져 있다. 예를들면 미학 챕터에서 미첼이 ‘이미지’를, 베르나르 스티글러가 ‘기억’을,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것은 미첼과 핸슨이 공동으로 집필했다. 사회 챕터에서는 키틀러의 <광학적 미디어>에서 유머와 통찰이 가득한 해제를 썼던 존 더럼 피터스의 ‘매스미디어’에 관한 글도 수록되어 있다. 저자들에 따라 글의 수위가 달라지긴 하지만, 디지털 미디어를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에 관한 집중력 있는 훌륭한 안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