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네장의 사진 이미지로부터 시작되었다. 1944년 아우슈비츠 내, 비르케나우 5호 소각장의 존더코만도 멤버 중 알렉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남자가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은 찍을 당시의 긴박함과 위험성을 알려주듯 초점이 정확하지 않은 먼 풍경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 사진 속 저편에는 분명 가스실에서 쏟아져 나온 시체 더미와 소각장의 자욱한 연기, 발가벗은 채 죽음을 기다리는 여성들이 서 있었다(알렉스라고 알려진 이는 알베르토 에레라라는 남자로 추정된다. 그는 그리스 레지스탕스 당원으로 활동하다 붙들려 수감되었으며, 이후 벌어진 아우슈비츠 봉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지난해, 서구 비평계에서 가장 격렬한 찬반 논쟁을 자극한 영화 <사울의 아들>(2015)의 감독 라슬로 네메시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이 2001년 저널, ‘쇼아의 역사’가 발간한 특별호 <재에 묻힌 목소리>와 그 네장의 사진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명의 유대계 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그는 이미 2001년에 존더코만도에 의해 남겨진 네장의 사진에 관한 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해 그는 <사울의 아들>의 감독, 라슬로 네메시에게 보내는 서한 형식의 긴 영화 리뷰를 완성한다. 우리에게 한권의 책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어둠에서 벗어나기>는 그 서한으로만 구성된 짧은 책이다.
우리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글을 읽기 전에 일명 수용소 문학, 수용소 예술로 통칭되는 작품들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적 개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른바 ‘재현 불가능성’ . 홀로코스트 혹은 쇼아라 불리는 그 재앙들은 인간 ‘이성’의 논리로는 결코 파악하기 힘든 참혹한 광기와 살인의 기계들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행위는 야만스럽다”라는 아도르노의 탄식처럼, 그리고 <어둠에서 벗어나기>의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비판하듯 홀로코스트는 “접근 불가능한, 상상할 수 없고 형상화할 방도조차 없는 환영의 공간”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수용소에 관한 많은 문학과 영화들은 재현의 금기, 재현의 윤리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 <어둠에서 벗어나기>는 논쟁적 영화 <사울의 아들>에 대한 찬사에 가까운 지지의 논평이며 재현의 금기에 대한 거부이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자신의 이미지 정치학의 영화적 적용이기도 하다.
위베르만은 라슬로 네메시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쇼아란 일종의 암흑의 구멍과 같은 것”이라 말한 바에 주목하며 시작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며, 네메시 감독이 비유한 ‘암흑’ , 즉 ‘어둠’의 개념은 위베르만의 이론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빛’의 반대적 개념이다. 어둠이 권력이라면 빛은 저항이다. 위베르만은 빛을 저항과 인식, 잔존하는 투쟁의 가능성으로 파악한다. 그런 그 앞에 1944년 수용소에 관한 네장의 사진. 그리고 그 사진에 기인한 한편의 영화가 주어진다. 그리고 질문한다. “이 암흑의 구멍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위베르만은 네메시가 영화를 만드는 행위는 그 암흑의 구멍에 빛을 비추는 것,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 그 ‘재현 불가능성’이라는 ‘군림하는 어둠을 신성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실천적 행위로 본다. 그리고 <사울의 아들>의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한다. 첫 번째, 재현의 전략- 형식미학. 그리고 두번째, 죽은 자를 위한 제의.
먼저 형식미학- 응시와 접촉의 이미지: 위베르만에게 <사울의 아들>은 미장센의 리얼리즘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작품이다. ‘미장센의 리얼리즘’이라는 위베르만의 용어는 다소 모호하고 제한적으로만 해석 가능하다(<쉰들러 리스트>를 비판하는 논거로서). 위베르만은 <사울의 아들>의 카메라가 사울의 클로즈업, 혹은 속내를 알 수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의 행위 동선만을 타이트하게 뒤쫓는 형식원리를 지녔다는 점에서 지지한다.
두 번째, 죽은 자를 위한 제의: “어둠에서 벗어나는 일은 망자의 비존재함에 저항하는 일. 죽은 아이를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역설적인 일이자 저항이다.” 위베르만은 사울이 죽은 아이의 시신에 집착하는 것은 알레고리의 시작이자 내러티브의 시작이라고 본다. 사울은 그의 장례 제의에 대한 집착이 동료들을 죽음으로 내몰 것이라는 비난에 “우리는 이미 죽었다”라고 응답한다. 이에 대해 위베르만은 “죽음으로부터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질문한다.
그러나 이쯤에서 생겨나는 의문. 위베르만의 사유 방식을 따르자면, 우리는 여기서 1944년, 기록의 책무로서, 정치적 저항으로서 한 존더코만도가 목숨을 걸며 남긴 그 증언적 사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 사진에는 수용소의 처참한 주검의 풍경과 그것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의 불안 그리고 책무가 존재한다. 그런데 정작 라슬로 네메시는 그 사진에 착안한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 그 두 주체를 모두 서사의 외부, 숏의 외곽으로 밀어낸다. 수용소의 참혹한 풍경은 사울의 클로즈업에 의해 포커스아웃되며, 서사에 잠깐 등장하는 사진작가는 사울의 기민함에 밀려난다. 심지어 위베르만이 거리두기, 비평적 사유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이 영화의 형식미학(사울의 얼굴에 집중된 방식)은 오히려 관객의 시선에서 불편함(수용소의 참혹한 풍경을 다시금 현재화해서 목격하는 것)을 덜어내고, 사울의 납득 불가능한 행위는 마치 스릴러 장르의 위험천만한 캐릭터마냥, 관객의 시선을 영화 속으로 유인하고 잡아채는 몰입의 기제로 작동된다. 역사를 영화적으로 극화하는 능력. ‘극화’가 수반하는 재현의 윤리 혹은 정치적 논쟁의 가능성. 그런 점에서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어둠에서 벗어나기>는 일면 <사울의 아들>에 관한 충실한 해석서이자 찬사이지만, 다른 한편 위베르만의 변증법적 사유와 방법론에 의해 끊임없이 영화에 관한 새로운 질문과 응답을 촉구하는 책이기도 하다. 영화의 의미란 감독이나 한 사람의 비평가에 의해 고정되거나 완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책에서 어떤 해석의 성좌를 그려낼 것인가는 독자에게 달려 있다.
<사울의 아들>. 미장센의 리얼리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
이미지 정치학
<반딧불의 잔존>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지음 / 김홍기 엮음 / 길 펴냄
국내에서는 다소 낯선 이름이기도 한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프랑스의 미술사학자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에서부터 현대 미술과 사진,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 분야는 꽤 넓다. 국내에서 그의 저작은 단 두권만 소개돼있다. <어둠에서 벗어나기>와 2012년에 처음 번역되어 소개된 <반딧불의 잔존>이 그것이다. 특히 <반딧불의 잔존>은 그의 ‘이미지 정치학’에 관한 이론적 논거를 폭넓게 제시한다. 총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지옥, 잔존, 묵시록, 민중, 파괴 그리고 이미지에 관한 사유를 전개한다. 발터 베냐민에서 자크 랑시에르와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미셸 푸코와 한나 아렌트, 심지어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넘나드는 위베르만의 사유는 현대사회의 권력과 민중, 체제와 저항, 예술과 이미지 등에 관한 폭넓고도 촘촘한 사상서라 할 만하다. 그는 또한 지가 베르토프와 장 뤽 고다르를 통해 몽타주를 사유의 방식이자 영화의 저항적 형식원리로 읽어낸다. 그리고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묵시록을 통해 네오파시즘과 전체주의에 대해, 무엇보다도 반딧불의 잔존과 빛이라는 그만의 논리를 시작한다. 가장 매력적인 것은 그의 글쓰기가 간결하고 명쾌하다는 점이다. <어둠에서 벗어나기>의 서한 형식처럼, 이 책 역시 다양한 학자들의 논지와 문화 예술, 역사의 파편들을 에세이적 글쓰기로 자유롭게 횡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