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의 맨살>은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다. 아니, 대체로 읽었지만 어떤 것들은 전혀 모르겠고 어떤 것들은 인상 깊었으며 어떤 것들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에 언제고 다시 읽으려고 연구실 책상에 책을 놓아두고 있다. 갑자기 읽고 싶으면 책을 들어 무작위로 읽다가 지치면 다시 놓아둔다. 때론 오후 내내 읽을 때도 있고 아니면 금방 피곤해져서 책을 덮을 때도 있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특정 작품의 표면을 맹렬하게 훑으면서 풀어내는 생각지도 못했던 통찰에 압도당하기도 하지만, 도무지 끝날 줄 모르고 한없이 이어지는 문장을 읽다가 흐름을 놓쳐서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 읽어도 알 듯 모를 듯 곤란해지는가 하면, 자기만의 영화론이 있는 사람 특유의 태도로 감독들을 위계적으로 평가하는 대목에서는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아서 책읽기를 멈추는 식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만신전에 들어갈 수 있는 감독들이나 작품의 수는 제한 돼 있다. 장 뤽 고다르는 되지만 클로드 샤브롤은 안 될 것이다. 존 포드는 당연히 입장되지만 존 포드를 매우 존경하는 마틴 스코시즈는 하스미의 만신전 앞에서 문전박대당할 것이다. 마틴 스코시즈 같은 감독에 대해 하스미가 보이는 적대감은 엄청난데 그가 잘 쓰는 표현에 따르면 스코시즈는 범용한 감독이기 때문이다. 하스미는 누군가 어떤 감독이 개성적인 표현수단을 갖고 있고 특수해지고자 하는 의지가 넘치더라도 바로 그 특수하려고 하는 태도때문에 범용해진다고 생각한다. 말장난 같지만 그가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을 일본에 소개한 지적 이력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사고이다. 그는 작가의 재능이나 자질의 차이를 뛰어넘어 대다수의 작품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다른 이와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려 하면 할수록 다른 이와 같은 범용한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장 뤽 고다르에 관한 걸작 에세이 ‘파국의 슬로모션’ 등의 글에서 강조되는데 이런 표현들이 나온다. “구로사와나 펠리니나 베리만은 개성적인 작가이고 그것을 실현시키기에 적당한 기술을 몸에 지니고 있다. 타인의 추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자신이 그들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다르는 전혀 개성적인 작가가 아니다. 그는 예전에 독창적이려고 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고다르는 제도, 서사 등의 범주로 묶을 수 있는 감독이 아니다. 그는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의 서사는 말할 것도 없고 화면이나 대사 모두 ‘어째서’와 ‘왜냐하면’이 배제된 채로 존재한다. “<여자는 여자다>(1961)라는 제목대로 거의 동어반복에 가까운 단순한 단정이야말로 고다르적인 문제인 것이다. 요컨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제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살인자는 살인을 한다는 명제를 하나의 운동으로서 눈으로 볼 뿐이다. 모든 조합의 잠재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현재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관점에서는 특수에 대한 의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고 다른 작품과의 차이에 대해 철저하게 둔감한 것만이 범용을 회피하는 자세인데, 우둔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그런 태도로 만든 작품을 통해 괴물 같은 것이 나타나고 관객은 황당무계하고 도착적으로 그 괴물과 조우하게 된다. 그의 영화론에서 옹호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의 괴물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작품군이다. 당연히 기성 평자들과는 다른 통찰로 감독들을 평가하는 하스미의 선구안은 예언자적인 데가 있다. 그는 평단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시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이미 범용치 않은 감독의 월계관을 씌워주는데, 이스트우드의 데뷔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를 평하는 그의 문장들은 대단한 역설과 통찰로 충만하다. 하스미에 따르면 이 영화는 “시대착오의 반시대성을 드러내고 마는 시간 감각의 착오가 역사적 감동을 준다”. 아메리칸 뉴시네마가 ‘베트남전쟁을 통해 미국이 짊어지게 된 좌절과 붕괴의 적당히 향수에 젖은 멜로드라마적인 표현에서 동어반복적인 역사의 반영을 읽는 것에 다름 아닌 것’에 불과했을 때 이 영화는 ‘표층에 떠도는 동시대성을 말끔하게 말소해버렸다’ .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가 대단한 것은 비평적인 해독판에 조금도 관련되지 않은 필름으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기꺼이 착각하는 가운데 그런 착 각을 일순도 허용하지 않는 이 영화를 보며 단지 공포를 느끼고 침묵을 느낄 따름이었다. 하스미는 이렇게 단정짓는다. “작가적 야심을 가지고 영화와 관계를 맺은 일련의 젊은 세대의 필름 체험의 범용함을 미리 폭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스트우드의 존재는 철저하게 비평적인 그것이었다.” 그는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사건은 오로지 육체의 표면, 사물의 표층에서 일어난다고 쓴다. 맨살에 환원된 활극이라는 말도 안 되는 시도를 실천한 놀라운 성과를 <건레트>(1977)에서 볼 수 있다고 찬양하며 ‘건물과 한대의 버스를, 파괴하는 것도 아니고 불태우는 것도 아니며 그 표면 가득히 무수한 탄흔을 남기는 기능만으로 환원된 총포’에 대해 경탄한다.
도대체 이런 문장을 쓰는 평자를 본 적이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문장은 숨은 심연의 소재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표층을 드러내고 가능한 한 거기에 머무르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사물의 표층에 머물고 거기에서의 장난에만 눈을 돌리는 전략인데 심층을 따지는 물음이 나오기 이전의 보류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만이 범용을 능숙하게 따돌리는 비평적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의 문장은 당연히 속을 알 수 없고 헷갈리고 요염하기 그지없지만 독자와의 밀고 당기기를 전제로 하는 게 아니라 밀고 당기기 끝에 독자가 나가떨어지기를 바란다. 정말 그렇게 된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시대착오의 반시대성을 드러내고 마는 시간 감각의 착오가 역사적 감동을 준다.
현미경의 눈으로
<감독 오즈 야스지로>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 윤용순 옮김 / 한나래 펴냄
하스미 시게히코는 롤랑 바르트나 장 피에르 리샤르로부터 계승한 주제론적 방법론을 영화에 활발하게 적용한다. 작품에서 고루 발견되는 테마군을 골라내 연결하여 그 작품이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과 다른 또 하나의 서사를 뽑아낸다. 이런 접근법은 작품=텍스트를 원래 그 창조주인 작가로부터 분리하고 텍스트를 더 자유롭고 다양한 독해 가능성으로 열어가는 바르트나 미셸 푸코 등의 접근법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한다. 바르트의 작가의 죽음이라는 명제가 함축한 대로 이런 접근법은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무수한 작품을 생성한다는 전도에 이른다. 텍스트론의 모순인데 하스미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그는 특정 작품에 대한 절대적으로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관객이기 때문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적 서사는 너무 압도적이어서 또 다른 읽기의 가능성을 간단히 제압해버린다.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 세계를 먹는다는 것,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 멈춰 서 있는 것, 날이 갠다는 것 등의 테마로 나누어 분석하는 이 책은 현미경의 눈을 지닌 평자의 묘사력에 경탄하게 만든다. 지극히 억제된 표현만을 거론하며 뺄셈의 영화로 평가받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덧셈의 영화로, 삼라만상의 기운을 껴안는 산물로 평가하는 <만춘>에서의 아버지와 딸의 동침 장면을 분석하는 대목 등이 무엇보다 인상 깊다. 서구 비평의 상투형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