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통·번역부터 로케이션 담당까지 ─ <아가씨> 조감독 후지모토 신스케
2016-10-31
글 : 윤혜지
사진 : 백종헌

일본인 특유의 억양이 아니었다면 한국인으로 오해받는 일이 부지기수였을지도 모른다. 후지모토 신스케 조감독은 오랜 한국 생활로 인해 입맛, 말투, 습관까지도 그저 보통의 한국인 청년과 다를 바가 없었다. 10여년 전, 도야마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던 후지모토 신스케는 공부보다 다른 일에 더 관심이 많아 대학 시절 내내 밴드 활동, 여행, 아르바이트 등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3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 국민대에서 도야마대학으로 교환학생을 보냈고, 외국 문화에 흥미를 느낀 후지모토 신스케는 “어쩌다보니 10명쯤 되는 한국인 학생들과 왁자하게 어울리며” 지냈다. 한국어가 자연스럽게 귀에 익숙해지자 취미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엔 한국으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오기도 했다. “한국의 같이 노는 문화, 찌개에 다들 숟가락 넣고 퍼먹는 그런 문화가 좋았다. 따뜻하고 가족처럼 느껴졌다. 하나가 된 것 같은 매력이 있었다. 일본인보다 한국인과 친해지는 게 더 쉽기도 했다. 그들은 친구 사귀는 걸 굉장히 쉽게 생각했다.”

2003년 봄, 학교를 졸업한 후지모토 신스케는 불현듯 한국행을 결심했다. “어차피 영화를 하려면 도쿄에 가야 했다. 그렇지만 도쿄에선 살아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선 교환학생으로 1년 동안 서울에 살아봤으니까 도쿄 생활보다 친근하게 느껴졌다. 영화 일도 하고 싶고, 한국에도 가고 싶은데 한국에서 영화 일을 하면 둘 다 할 수 있는 거잖나. 좋네. (웃음)” 제작이 뭔지, 연출이 뭔지도 몰랐던 그는 무작정 한국에 와 “소문”부터 퍼뜨리기 시작했다. 연예인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지인을 통해 한국 현장에서 영화를 하려고 한국에 온 일본인이 있다는 입소문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충무로 입성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지인 집에 머물기도 했고, 한달에 17만원짜리 고시원 생활도 했다. 월급은 못 받아도 영화사를 들락거리면 밥도 주고 용돈도 받으니 괜찮았다. 영화사 두어 군데를 전전하며 제작팀 막내로 일했지만 영화가 엎어지거나 회사 사정이 나빠지면서 월급조차 받지 못하고 일을 그만두기도 했다. “그렇게 몇달을 허송세월했다. 일본어 과외라도 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는데 내가 영화를 하러 온 거지 언어를 가르치러 왔나 싶기도 했고, 언제든 부르면 바로 달려갈 수 있도록 기회를 기다리려고 다른 일엔 눈도 돌리지 않았다. 0과 1 사이 어디쯤에 내가 있었다. 역시 외국인이 한국 현장 와서 일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나, 싶었다. 그러다 간판만 읽고 다녀도 어학공부를 하는 거라고, 이것저것 두드려보고 있으니 된거 아니겠냐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힘겨운 한국 생활을 견디게 해준 건 “술과 술친구”였다. “밤마다 술먹고 힘들다 할 때 옆에서 얘기 들어주며 어깨 토닥여주는 한국의 술문화가 정말 좋았다. 다 같이 밥먹고 형, 누나들이 술 사주는 문화 말이다. 타지에서 외로워도 누군가는 늘 곁에 있다는 데 안심했다. 도쿄에서 그러고 있을 걸 생각하면 혼자였을 것 같고 무서웠다. 여기선 외국인이라는 방패라도 있지만, 일본에서였다면 그게 내 현실이었을 테니까.”

그러다 <태풍태양> 제작팀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숱한 한국영화의 제작팀 혹은 연출팀 팀원으로 일했고 간혹 한•일 합작영화가 있으면 시나리오 검수와 현장 진행, 통역을 전담하기도 했다. <마이웨이> 땐 오다기리 조의 전담 통역을 담당했다. <아가씨>는 후지모토 신스케의 커리어 중 가장 큰 역할을 맡은 영화였다. 일본팀 조감독으로 일하며 일본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한 2주간 7회차 현장을 도맡았다. “국민성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한데, 한국 영화현장은 일단 해보자는 정신이 있다. 물론 준비 자체도 꼼꼼하게 하지만, 현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대처도 빠르다. 나는 일본인이지만 처음부터 영화 일을 한국에서 배워서인지, 그런 신속함과 융통성이 나의 바탕이 돼버렸다.”

현재 후지모토 신스케는 9년째 공덕동 만리재고개에서 복닥복닥한 빌라촌 생활을 하고 있다. 이사 예정은 없단다. “1층 주인집 할아버지와는 별별 일로 많이도 싸웠는데 어르신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내가 맞춰가면서 살기로 했다. 가끔 일본 다녀올때 과자를 한아름 사다가 안겨드리니 점점 마음을 여셨다. 종종 ‘신스케야, TV 고장났으니 고쳐다오’ 그러신다. (웃음) 집 근처 슈퍼 형님과도 친하다. 형이 가끔 가게를 비울 때 대신 카운터를 봐주기도 하는데 웬 외국인인가 싶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손님의 눈빛을 알아채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이다. (웃음) 슈퍼 앞에 조그만 간이 의자를 놓고 동네 아저씨들이랑 캔맥주나 막걸리를 마시기도 한다. 내가 어디 가서 50, 60대 아저씨들이랑 친구로 지내겠나. 여기 살면서 특이하고 좋은 경험을 많이 하고 있다. 부모님은 늘 돌아오라고 하시지만 사실 영화보다 사람이 좋아서 한국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가씨>

일본 프로덕션의 실력자

<아가씨>의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후지모토 신스케는 제작부와 미술 통역을 겸했다. 미술에 가장 공들인 영화이다보니 1930년대에 쓰인 옛 일본어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촬영을 시작하고선 조감독으로 포지션을 바꿔 일본 촬영을 진행했다. “한•일 합작 프로젝트를 하는 영화인은 신스케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가씨>의 일본 프로덕션과 헌팅, 현지인 섭외 등 일본과 관련된 여러 업무를 총괄한 김종대 프로듀서의 단언이다. 풍부한 합작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한국과 일본 양국 현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스탭이란 의미에서다.

조감독 <아가씨>(2016) <아이 엠 어 히어로>(2014) <딸기우유>(2013) <고양이 소녀>(2013)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2011) 연출부 <무명인>(2013) <맨발의 꿈>(2010) <보트>(2009) <비몽>(2008) <더 게임>(2008) 제작부 <야수>(2006) <태풍태양>(2005) CG팀 <구미호가족>(2006) 스크립터 <피안도>(2010) 시나리오 번역 또는 감수 <오춘기>(기획 중) <대호>(2015)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2014) <무명인>(2013) <미스터 고>(2013)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2011) <마이웨이>(2011) 통역 <맨발의 꿈>(2010) <피안도>(2010) <보트>(2009) <비몽>(2008)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