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구교환)은 좋은 사람이다. 갈 곳 없는 소현(이민지)을 재워주고 먹여주며 삶의 격률을 가르치는 그녀는 대모이자 대부 역할을 한다. 그녀가 들고온 미러볼, ‘버려진 것은 주운 사람 것’이라며 가져온 바닷가의 공은 모두 소현의 둥근 얼굴과 닮아 있다. 그녀는 소현이라는 미러볼을 비춰주는 광원이며 그래서 소현이 빛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지나치게 착하다. 낭만성이 가출 청소년들의 실제 삶을 은폐한다는 생각이 들 때쯤 제인이 죽고, 현재인지 과거인지 모를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차라리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등장인물의 대사와 행동, 촬영 방식과 조명까지 서로 너무 달라서 마치 같은 등장인물을 공유하는 두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이질감마저 든다. 이질감 속에서 가출 청소년들이 처한 날것 그대로의 현실이 시작된다. 제인과의 달콤한 이야기가 앞서 끝나버렸기에 현실은 더욱 쓰게 다가온다. 그리고 제인과 함께 살던 지수(이주영)가 죽으면서 앞의 이야기와 연결고리가 단절되었을 때, “제가 처음 배운 말은 거짓말이었대요”라는 독백의 의미가 드러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소현의 거짓말, 혹은 꿈이었던 것이다.
꿈에서 소현은 정호를 기다린다. 소현에게 행복은 정호와 같이 살던 시절뿐이며, 그래서 정호를 기다리는 일은 소현이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상상이다. 소현은 정호가 오면 모든 불행이 사라질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정호를 기다리는 일조차 불가능하다. 기다림은 공간을 가진 자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현의 기다림에 대한 희망은 곧 공간에 대한 희망이다.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된 소현의 꿈에서는 공간이 강조되지만, 핸드헬드로 촬영된 현실에서는 공간이 드러나지 않는다. 공간은 마치 소현처럼 흔들리고 고정되지 않는다.
소현은 제인에게 자신의 환지증(幻肢痛)에 대해 설명한다. 소현은 분명히 간지러움을 느끼지만 긁어야 할 발가락이 실재하지 않는다. 소현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소현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존재는 있는데 존재할 공간이 보이지 않는 것은 간지러움이기도 하지만, 소현 자신이기도 하다. 물리적 공간을 가지지 못하는 소현은 환지처럼 혹은 이미지처럼 존재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소현에겐 현실이 꿈이다. 소현의 거짓말은 거짓에 대한 거짓이라는 점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작업이며, 현실의 기만을 견디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소현의 낭만적인 꿈은 존재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꿈은 기억의 조합과 변형으로 이루어진다. <꿈의 제인>도 여러 사람을 조합해서 만들었는데, 주된 인물은 제인이 아니라 소현을 보호하려 했던 지수다. 제인의 죽음과 지수의 죽음이 겹쳐지는 것도 이런 이유이며, 소현은 죄책감으로 인해 지수의 이미지를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꿈의 제인>에는 제인에 대한 동경과 고마움이 반영되어 있다. 소현의 꿈은 불행한 삶에서 드문드문 있었던 행복을 모아 만든 것이며, 이 행복들은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작은 연대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는 연대가 희망이 되는 과정을 말하고 있으며, 이 영화의 형식이 어렵다면 그것은 오직 연대와 희망을 말하는 작업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