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기 얼굴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거울을 통해 보는 자신의 상에는 주관이 투영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를 “거울에 의한 반성에는 공범성이 존재한다”고 표현한다. 거울에 맺힌 상만 보던 인간은 자기 모습이 찍힌 사진 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질감과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의 눈으로 본 자신의 모습과 타자의 눈으로 본 자신의 모습 사이에는 간극이 큰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계-내-존재자가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타자, 즉 세계에 속하지 못한 이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을 보기 위해서는 또 다른 타자의 눈이 필요하다.
신성하고 저주받은 인간
아감벤에 따르면, 로마시대부터 살해해도 처벌받지 않으며 죽어도 어떤 희생제의도 요구되지 않는 인간들이 있었다. 이들은 ‘호모 사케르’란 이름으로 불렸다. 사케르(sacer)란 원래 ‘신성한’이라는 의미이지만 ‘저주받은’이라는 상반된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이 양가성의 원인은 아마도 니체가 “그리스 신들은 죄와 악의 원인으로 이용되었다”고 말한 대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호모 사케르들에 대한 동일화 가능성은 배제된다. 이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동물로 취급되었고, 그래서 호모 사케르는 기소된 범죄자가 아니라 기소되지 않는 자, 즉 (합법적)재판을 받지 못하는 자였다. 아감벤은 법의 본질이란 주권권력이 벌거벗은 생명과 법적 보호 대상을 구별하는 것, 외부와 내부에 대한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추방령이 영토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법이 벌거벗은 생명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을 당하든) 가만히 있으라는 것뿐이다. 아감벤은 “현대사회에서 하나의 호모 사케르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티 해리> 시리즈에서 주인공 해리는 사회적 관계를 거부하는 고독한 개인으로, 서부영화의 영웅상을 계승하는 인물이다. 그는 ‘쓰레기’들을 엄벌하여 엄격한 질서를 유지하기를 희망하지만, 법의 존재는 그에게 방해가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하듯 ‘쓰레기’가 되는 것은 쓰레기의 내재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규정 때문이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에 따르면, 고대 게르만족은 ‘무법자’를 ‘신성한 늑대’라고 불렀다. 그래서 서부영화 속 ‘무법자’들은 호모 사케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요짐보>(1961)에서 ‘요짐보’가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 점에서 상징적이다. 또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에서 법과 언어로 대표되는 랜스는 리버티뿐만 아니라 톰과도 대립하는데, 랜스 즉 언어의 세계와 대립하는 톰과 이름이 없는 요짐보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양자 모두 언어로 규정되길 거부하는 자이며, 욕망 그 자체와 닮아 있다. 그리고 해리가 경기장에서 살인범을 쫓는 시퀀스에서는 마치 심연과도 같은 한밤의 경기장을 배경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해리와 범죄자가 구별되지 않는다.
처벌되어야 할 욕망의 다른 이름
<친절한 금자씨>(2005)에 등장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짐승, ‘백 선생’의 고통은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대리인들에게 보상이 된다. 타인의 신체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쾌락을 느끼는 가학적 성향은 근대 이전에는 지극히 ‘합법적’이었다. 예컨대 <왼편 마지막 집>(2009)은 평온한 일상, 낯선 자들의 침입과 그로 인한 일상의 파괴, 낯선 자들에 대한 처벌을 통한 일상의 회복이라는 장르적 관습을 따라가고, 피해자들의 복수에 이입하게 된 관객은 범죄자들의 고통에서 죄책감 없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퍼니게임>(1997)에서는 마네의 <올랭피아>처럼 관찰자와 피관찰자가 역전되며, 관객은 프레임에서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 순간 관객은 스크린이라는 거울을 통해 투영된 자신의 욕망을, 공범성을 발견한다. ‘퍼니 게임’이 실은 관객의 ‘퍼니 게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영화 속 범죄자의 고통을 보며 느끼는 쾌감은 정의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욕망과 관련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욕망에 대한 억압은 호모 사케르들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난다.
봉준호의 영화들은 법의 ‘하지 않음’을 통해 호모 사케르를, 사람들의 민낯을 관찰한다. <플란다스의 개>(2000)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비정규직 일자리에서 해고되어 숲을 배회하는 현남은 아감벤이 설명하는 ‘반은 도시에, 반은 숲속에 존재하는 잡종 괴물로, 원래는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자의 모습’으로 늑대인간 이미지와 일치한다. 그리고 <살인의 추억>(2003)에서 현규도 전형적인 늑대인간 이미지다. 비단 이들뿐만 아니라 봉준호의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다. 그래서 철학자 홉스의 말처럼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가 되는 것이다.
<언노운 걸>(2016)에서 이주민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자로 취급되기에 그녀의 죽음은 이미 죽은 자의 죽음처럼 낯설다. 제니가 존재하지 않는 자의 입장에서 말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본 것처럼 불쾌해하며 그녀를 멀리한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도그빌>(2003)에서는 벽과 문, 그리고 개를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게 설정했다. 오히려 조형물로서 창문은 설치해놓았는데, 가장 크고 햇빛이 잘 드는 창문이 앞을 보지 못하는 잭의 집에 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마을 주민들이 타자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화는 중요한 것들을 보이지 않게 설정함으로써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분리되지 않는 존재의 시간
존재의 시간을 통해서 호모 사케르들은 통합된 주체로서의 자신을 드러낸다.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가 보여주는 것도 로제타의 시간이다. 영화는 로제타를 계속 따라가는 카메라를 통해서 로제타의 분절되지 않는 시간을 담는다. 그 시간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욕망과 윤리가 공존하는, 분리되지 않은 주체다. 로제타가 호수에 빠진 친구를 그대로 내버려둘지 망설였던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죄와 양심의 투쟁장소로서의 로제타가 존재하는 것이다. <미씽: 사라진 여자>(2016)도 지선이 한매가 있었던 공간을 경유하면서 벌거벗은 생명인 한매의 시간을 발견한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가 끝없이 교차편집되며, 현재의 존재는 과거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선은 한매가 자신을 보던 슬픈 눈을 발견함과 동시에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신을 발견한다. ‘보는 자’의 윤리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언노운 걸’과 한매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 하나의 관계였다. <언노운 걸>에서 범인의 폭행에 의해 떨어진 제니의 외투 단추는 이주민 여성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단추는 옷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 의미를 가질 뿐 옷에서 벗어나 아무 데나 떨어진 순간 쓰레기와 다름없어진다. <욕망>(1966)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보이지 않는 테니스공도 마임이스트들의 관계 내에서는 존재하듯이, 존재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렇기에 상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존재를 찾는 일이다. 카메라는 문을 닫은 사람들에게 문 바깥에 선 사람들을 보여주는 창문이 된다. 카메라는 사람들과 호모 사케르의 시선을 매개하고, 문을 닫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는 벌거벗은 자들에게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권한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