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 작가의 가장 근작(2013년 출간) 장편이자 열한 번째 소설책이다. 2017년에 나온 작가의 소설집이 있음에도 <씨네21> 북엔즈의 서가에 <살인자의 기억법>을 꽂은 이유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9월 개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짧게 압축된 문장은 매우 힘이 있어 읽히는 속도감이 엄청나다. 단숨에 읽히는 것이 아쉬워 ‘작가의 말’을 들여다보니 이런 설명이 뒤따랐다. ‘이번 소설은 유난히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루에 한두 문장씩밖에는 쓰지 못한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꽤나 답답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주인공의 페이스였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 아닌가. 그래서 마음을 편히 먹고 천천히 받아적기로 했다.’ 은퇴한 연쇄살인범, 알츠하이머에 걸린 그는 가끔 ‘살인의 추억’을 복기하며 살아간다. 우연한 기회에 살인을 멈춘 그는 피해자의 아이였던 딸을 키웠는데 어느 날 마을에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는 갑자기 출현한 후배 연쇄살인마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홀로 사건을 추적하고 그 사이사이로 과거의 기억이 편린처럼 박히며 사건의 진위가 어지러이 섞인다. 독자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일인칭 시점을 따라가야만 하니 추리의 영역이 적어 완전히 화자를 믿을 수밖에 없지만 소설은 몇장을 남겨두지 않고 파괴적인 반전을 던진다. 그때가 바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천천히 소설을 복기할 시점. 영화는 소설과 다른 결말을 준비했다고 하니 영화 관람 시점과 무관하게 책을 집어 들어도 좋을 것이다.
생의 짓궂은 농담
또 엉뚱한 곳에서 정신을 차렸다. 처음 와보는 동네다. 자꾸만 어디론가 가려는 나를 제지하기 위해 동네 청년들이 점방에 모여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내가 겁을 집어먹고 난동도 부렸다고 한다. 경찰관이 와서 무전을 쳐보더니 나를 경찰차에 태웠다. 자꾸만 기억을 잃고 어딘가를 헤매다 동네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상태에서 경찰에게 붙들린다.
반복된다 : 군중, 포위 그리고 경찰에 의한 연행.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35쪽)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