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은 늘 실패한다. 감히 영화를 평가하는 행위가 공식적으로 허용되는 이유는 새롭고 독자적인 무언가를 발굴하고 알리는 순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대의 비평이 걸작을 반드시 알아보리란 법은 없다. 걸작이라는 평가가 시간이 지나서도 유효하리란 보장도 없다. 당대 평론가 중 더글러스 서크의 진가를 알아본 이가 얼마나 있던가. 폭력의 피카소라 불린 샘 페킨파 역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흐름 속에 있을 땐 흐름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 법이다. 당대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전혀 다른 시간, 전혀 다른 자리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영화의 영토는 현재는 물론 과거,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시작된 물결을 통해 조금씩 지평을 넓혀왔다. 감독들의 사랑을 받은 감독 스즈키 세이준도 뒤늦게 진가를 인정받은 거장 중 한 사람이다.
살아남기 위해 틀을 부수다
스즈키 세이준은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60년대에는 주목받는 감독이 아니었다. 오시마 나기사 등 동세대 감독들이 쇼치쿠 누벨바그의 기수가 되어 세간의 찬사를 받을 때 그는 그저 그런 B무비를 양산하던 감독 중 한 사람이었다. 1956년 <승리는 나의 것>으로 데뷔한 스즈키 세이준은 67년까지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40편이 넘는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다. 그의 다작은 어떤 측면에서는 강요된 것이었다. 상영, 배급에 주력하던 닛카쓰 영화사는 제작부문을 강화해나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력자와 신인을 발굴했다. 닛카쓰로 옮긴 뒤 겨우 2년 만에 입봉하게 된 스즈키 세이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마무라 쇼헤이가 아니었다. A급 시나리오를 받을 수도 없었고 충분한 제작비나 여유 있는 제작기간 따위는 바랄 수도 없었다. 메인 흥행영화의 보조 수단, 공급 편수만을 채우기 위해 마구 찍어내던 동시상영용 B무비 감독이 그에게 허락된 길이었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스즈키 세이준의 자양분이 되었다.
닛카쓰 영화사는 정해진 기간 내에 정해진 편수를 공급할 수만 있다면 그외 다른 요소는 어떤 부분도 간섭하지 않았다. 닛카쓰의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장르와 스튜디오의 특색마저 구애받지 않는 무국적성일 것이다. 한정된 조건하에서의 완벽한 자유, 그것은 스즈키 세이준의 감각을 자극하는 최상의 환경을 제공한다. 여기에 하나 더, 스즈키 세이준은 B급 영화를 만들되 주목받고 싶었다. 기계적으로 영화를 찍어낼 수밖에 없지만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도달한 결론이 당대의 보편적인 관념에서의 좋은 영화가 아니라 튀는 영화였다. 빈약한 시나리오와 터무니없는 제작기간을 극복하기 위해선 남들과는 달라야 했다. 이러한 무국적성, 뿌리 없는 형식은 장르영화의 관습을 거침없이 깨부수는 독자적인 스타일로 연결된다. 스즈키 세이준은 장르로부터 일탈하고 싶어서 틀을 부순 것이 아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틀을 부수는 것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스즈키 세이준에게 충분한 물량과 여유로운 환경이 제공되었다면 지금처럼 들끓는 에너지가 기이한 형태로 뭉쳐진 영화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스즈키 세이준이란 이름은 시대의 제약과 조악하면서도 자유로웠던 제작환경, 그리고 창작의 욕망이 빚어낸 기적 같은 우연이다. 당대의 비평가들은 이 기적을 알아보지 못했다. B무비의 거대한 창고에 처박힌 채 시시하고 멍청하며 말초적인 영화 취급을 받았다. 그렇게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들은 A영화의 곁불을 쬐며 동시상영으로 소모되어 스러져갔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은 대개 시궁창에서 피는 법이고, 새로움이란 변두리에서부터 퍼져나간다. 스즈키 세이준이 선보인 엉망진창의 혁신은 조악함과 무질서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기적 같은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그 절박한 기적은 시대를 뛰어넘어 또 다른 기적을 꿈꾸는 감독들에게 영감을 안겼다. 왕가위, 오우삼, 쿠엔틴 타란티노, 짐 자무시, 박찬욱 같은 이들에게 말이다. 기괴한 이미지와 스타일로 몇몇 영화광들 사이에 회자되어왔던 특별한 경험들은 시간과 국경의 장벽을 넘어 지금 우리 앞에 소환되었다. 2002년 한국에서 회고전이 열려 방한했을 당시 “너무 얼떨떨해서 어둠 속에서 볼을 꼬집힌 기분”이라던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심정은 이제야 그를 발견한 관객의 심정이기도 할 것이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는 2017년 세상을 떠난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적 유산을 기리기 위해 그를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에 선정했다. 이와 함께 ‘스즈키 세이준: 경계를 넘나든 방랑자’ 특별전을 마련해 그의 영화적 도전과 독특한 스타일을 만날 기회를 마련했다. 그간 몇 차례의 회고전으로 국내 관객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여전히 모자란다.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를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는 한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되살아난다 해도 전혀 빛바래지 않을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7편의 영화를 꼽아 소개하는 이번 특별전에서는 <육체의 문>(1964), <동경 방랑자>(1966), <살인의 낙인>(1967) 등 닛카쓰 시절의 스즈키 세이준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작뿐 아니라 <지고이네르바이젠>(1980), <아지랑이좌>(1981), <유메지>(1991) 등 다이쇼 로망스 3부작을 만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8년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2001년 <피스톨 오페라>가 상영될 예정이다. 다무라 다이지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육체의 문>은 육체 3부작의 첫 번째 영화로 당시에 파격적인 성묘사로 충격을 안겼다. 단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넘어 일종의 영상 실험에 가까운 시도들을 발견할 수 있는 문제작이다. 스즈키 세이준 영화를 관통하는 특징 중 하나는 전반적으로 엉성할지라도 단 한 장면,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는 점이다. <육체의 문>은 그러한 형식 파괴의 일면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서구 영화인들에게 열렬한 찬사를 받은 <동경 방랑자>와 <살인의 낙인>은 스즈키 세이준의 이름을 알린 실질적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튜디오가 허락하는 범위하에서 아슬아슬하게 자신만의 미학을 시도했던 스즈키 세이준은 <살인의 낙인> 이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질타와 함께 닛카쓰에서 해고당한다. 역설적이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이 영화가 스즈키 세이준을 대표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두 영화 모두 거창한 철학적 탐색이나 전후 일본 사회의 동시대적 고민들을 품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얼토당토않은 전개와 이미지들을 응축해놓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과 감각적인 충돌이야말로 스즈키 세이준 영화의 정수다. 메시지와 이야기에 전도될 틈도 없이 오직 영화적인 유희에 집중하는 무국적 영화, 순수한 영화적 경험의 산물인 것이다. 폭력의 유희와 과잉된 이미지들은 오직 영화적인 상상력만으로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증명한 영토의 확장이라 할 만하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다
1967년 이후 연출을 맡을 수 없었던 스즈키 세이준은 10년이 훌쩍 지난 1980년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시작으로 <아지랑이좌> <유메지>까지 이어지는 다이쇼 3부작을 완성한다. 거품 경제의 몰락을 눈앞에 두고 다이쇼 시대라는 시공간을 선택한 건 파국의 징후를 감지한 스즈키 세이준의 동물적 감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즈키 세이준은 다이쇼 3부작을 통해 닛카쓰 시절의 폭력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탐미적인 스타일을 선보였다. 하지만 방식이 달랐을 뿐 폭력이든 탐닉이든 본질은 같다. 장르로 고정된 무언가에 기대거나 이야기를 앞세우는 대신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스즈키 세이준의 진면목이다. 그리하여 스즈키 세이준 미학의 정점이자 영화계 퇴출의 계기가 된 <살인의 낙인>을 스스로 리메이크한 <피스톨 오페라>에 이르면 진정 스즈키 세이준다운 것이 무엇인지 절감할 수 있다. 과잉으로 점철된 이미지의 범벅 속에서 발견된 영화적 쾌감. 문법을 파괴하고 영화를 가지고 노는 유희 정신. 스즈키 세이준은 예전에도 놀라웠고, 지금도 새로우며, 앞으로도 신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