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①]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할리우드 흥행의 의미
2018-09-05
글 : 안현진 (LA 통신원)
아시아 문화까지 완벽 이식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포스터

주요 배역진이 아시아계 배우들로 캐스팅된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관객과 만난 일이 1993년 웨인 왕 감독이 연출한 <조이럭 클럽> 이후 무려 25년 만이라고 한다. 지난 8월 15일, 북미에서 개봉해 첫주 흥행 수입으로 3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당당하게 1위로 개봉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는 그저 ‘슬리퍼 히트작’이라고 부르기에는 사회·문화적으로 복잡한, 그래서 설명이 필요한 흥행작이다. 영화는 개봉 둘쨋주 주말 동안 2500만달러를 추가로 벌어들이며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켰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흥행과 그로부터 만들어진 다양한 대화와 캠페인을 바라보며 영화를 연출한 존 추 감독(<나우 유 씨 미> 시리즈, <스텝업2: 더 스트리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영화(movie)가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movement)이다.” 견고한 유리천장과 대나무천장(Bamboo Ceiling)으로 가로막혔던 할리우드는 지금, 이 영화의 예상치 못한 흥행이 불러온 파문을 두고 뜨거운 논의를 진행 중이다.

중국이 미국 영화산업에 끼친 영향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뉴욕에서 대학 교수로 일하며 동료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중국계 미국인 레이첼 추(콘스탄틴 우)와 싱가포르 출신의 닉 영(헨리 골딩)은 현재의 서로에게 끌려 사귀지만, 알고보니 닉은 어마어마한 재벌가의 자제였다. 그는 어려운 가정에서 열심히 공부해 교수가 된, 이민자 가정의 성공한 2세인 레이첼과는 시작부터가 다른 금수저 중의 금수저다. 레이첼은 닉의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와 함께 싱가포르로 떠나면서 그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게 된다. 이런 커플의 앞날에 가장 큰 장애물은 (한국 관객에게는 너무나 익숙할) 닉의 어머니 엘레노어 영(양자경)이다. 엘레노어는 가난한 집안 출신인 레이첼이 눈에 차지 않는 데다가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전통적인 동양적 가치에 반한다고 판단하고는 둘 사이를 반대한다. 하지만 레이첼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지혜롭게 상황을 타개하고, 영화는 연인의 사랑은 물론이고 가족 사이의 사랑까지도 아름답게 지켜낸다. 싱가포르계 미국 작가인 케빈 콴이 쓴 동명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인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는 줄거리만 보면 뻔하디 뻔한 영화 같다. 게다가 장르도 이제는 박스오피스에서 보기 어려워진 로맨틱 코미디다. 화려함을 더 화려하게 시각화하는 영화화 과정 중에 원작의 행간을 풍요롭게 만든 문맥들은 흐릿해졌지만 그래도 유쾌한 분위기를 잊지 않고 중요한 순간에 사랑, 진심, 가족 등 불변의 가치를 내세워 “기분 좋은 영화”(Feel Good Movie)라는 호평을 받았다. 또한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닷컴에서 신선도 93%를 기록하는 등 개봉 전부터 흥행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 인구에서 아시아계 이민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5.8%로 적은 편이다. 하지만 중국이 전세계 2위의 영화시장으로 떠오르고, 미국 내 거대 극장 체인을 중국 기업이 인수하는 등 미국 영화산업에서의 중국의 파워는 막강하며,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 대한 할리우드의 박스오피스 의존도 또한 높은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세계 인구에서 아시아계는 무려 44억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할리우드가 이를 인정하는 방식은 구색을 맞추는 정도였다. 중국 시장에서 영화를 개봉하려면 단역에 아시아계 배우를 캐스팅하거나, 무술에 능한 캐릭터로 묘사하거나, 아시아 지역에서 일부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하는 정도에 그쳐 아시아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2014),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2016),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2016) 등과 같이 애초에 중국 시장을 겨냥해 만들어진 영화들, 그래서 할리우드에서보다 중국에서 훨씬 더 흥행한 영화들도 아시아적 요소를 영화의 배경으로 소비하거나 끼워넣는 것이 전부였다. 중국 제작사와 긴밀하게 협업한 성공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그 역시도 <쿵푸팬더3>(2015)같이 이야기 자체가 아시아적 요소를 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017년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6년 개봉한 흥행 수입 상위 100편의 영화 중에서 아시아계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는 37편에 불과했다. 이 37편조차 대사가 있는 역할인지를 따진다면 아시아계 배우가 의미 있는 배역으로 출연한 영화의 편수는 더 줄어들 것이다.

이런 가운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가 2주 연속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한 것은, 비록 8월이 관객이 덜 드는 한산한 기간이라고 할지라도 할리우드가 캐스팅에 있어 그토록 무관심했던 데모그래피(인구변동)가 실은 티켓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였음을 증명한다. 특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개봉 첫주에 영화를 본 관객의 44%가 아시아계였으며, 그중 68%가 여성 관객이었다는 조사 결과는 백인 남성 관객을 겨냥한 영화를 주로 기획하고 제작해온 할리우드로서는 아시아계 관객 시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수령이었을 것이다.

<서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원작자가 넷플릭스를 거절한 이유

경제 잡지 <포브스>에 따르면 비백인계 관객 니치마켓에 대한 데이터는 오랫동안 수집됐다고 한다. <헬프>(2011), <히든 피겨스>(2016), <걸즈 트립>(2017)으로 비백인계 여성 관객의 티켓 구매력은 증명됐고, 올해 최고 흥행작인 마블의 <블랙팬서>조차 주요 타깃 관객층이 아닌 관객이 일구어낸 흥행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블랙팬서>의 첫주 관객의 58%는 흑인으로 조사됐다. 지난 몇년 동안 소셜미디어를 통해 알려졌던 #WhiteWashing, #OscarSoWhite, #StarringJohnCho와 같은 영화산업 내 인종차별과 관련된 캠페인을 돌이켜보면 할리우드는 산업이 표방하는 개방성과 다양성을 성실하게 대변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에마 스톤은 <알로하>(2015)에서 1/4 중국계, 1/4 하와이안 원주민의 피가 흐르는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캐릭터의 이름도 ‘앨리슨 응’(Allison Ng)이어서 스톤의 출연을 두고 논란이 있었고,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2017)에서 일본 원작 만화 속 주인공을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함으로써 ‘인종세탁’에서부터 ‘백인우월주의’까지 거론되는 ‘화이트워싱’ 논란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대니얼 대 김이 캐스팅되는 것으로 상황이 무마되기는 했지만, <헬보이> 리부트 프로젝트에서 일본계 미국인 벤자민 다이미오 역에 처음 캐스팅된 배우는 에드 스크레인이었다.

사실 캐스팅을 둘러싼 인종차별과 관련해서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역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주인공 닉 영 역에 헨리 골딩이 캐스팅됐을 때, 일각에서는 골딩이 백인 혼혈이라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원작자인 케빈 콴이 “일생의 대부분을 싱가포르에서 살아온 그가 동양인이 아니라면 누가 동양인이냐?”고 반문하는 것으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이 에피소드는 인종차별이 할리우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씁쓸한 현실을 재확인시켰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영화화와 배급권을 갖기 위해 러브콜을 보낸 많은 스튜디오 중에서 가장 큰 액수를 제시한 곳은 넷플릭스였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흥행이 화제가 되고 1주일 뒤 속편 제작이 결정되기는 했지만 넷플릭스는 애초에 3부작 제작까지 함께 제안했었다. 그럼에도 원작자인 케빈 콴과 존 추 감독은 “이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해야 한다. 그래서 메이저 스튜디오의 마케팅 지원을 받아야 한다. 주요 배역이 모두 아시아계 배우로 캐스팅된 이 영화가 할리우드의 정형화된 시스템에서도 성공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며 넷플릭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상업적인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스트리밍 플랫폼이라는 쉬운 선택을 했다면,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아시안 아메리칸 관객을 겨냥한 영화의 흥행 가능성은 증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제작과 관련한 미담은 더 있다. 케빈 콴이 제작사를 고를 때 수많은 스튜디오의 유혹적인 제안을 물리치고 컬러포스(Color Force)와 아이반호(Ivanhoe)와 고작 1달러짜리 계약을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계약에는 콴을 영화화의 전 과정에 관여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정하는 조건이 붙었다. “나에게 고액의 옵션 비용을 지불하느라 영화화가 늦어지거나 좋은 작가를 고용하지 못할까봐 두려웠다”고 콴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흥행 비결로 그는 “인종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이야기의 힘”을 꼽는다. 영화가 개봉한 첫 주말, 필라델피아의 한 상영관에서 만난 백인 남성 두명이 “영화를 보며 오랜만에 울었다”고 이야기한 데서 콴은 특별한 감흥을 느꼈다고 말한다. 실제로 첫주 관객의 절반 가까이가 아시아계 관객이었던 데 반해 둘쨋주에는 아시아계 관객의 비중이 27%로 뚝 떨어졌다. 이렇게 타깃 관객층의 비율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1위를 고수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미디어 분석가들은 “입소문의 덕”을 봤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입소문 덕분에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가 흥행 장기전에 돌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포브스>는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2011년 8월 개봉한 <헬프>가 잔잔하게 흥행을 이어가다가 다음해 오스카 레이스에서 존재감을 발휘한 전적을 이 영화가 따를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포스터

<서치>와 넷플릭스 드라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흥행이 불러온 연쇄효과는 아시아계 배우와 아시아계 관객에 대해 지엽적으로만 이해했던 미국 영화산업에 경종을 울리는 데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개봉 2주차에 불과하지만 이 영화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다른 아시아계 캐스팅 영화 <서치>(존 조 출연)와 TV시리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넷플릭스)와 삼각대 같은 지지구도를 형성하며 함께 밀어주고 끌어주고 있다. 미디어에서는 2018년 8월에 아시아계 캐스팅 영화와 TV시리즈가 대거 출현한 현상을 두고 ‘#AsianAugust’라고 태그를 붙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올해 8월에 갑자기 이런 영화들이 나오게 됐다기보다는 콘스탄스 우가 출연했던 이민자에 관한 TV시리즈 <프레시 오프 더 보트>(2015)가 방영되고, 역시 한국계 미국 배우이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에 작은 역할로 출연한 켄 정이 타이틀롤을 맡은 TV시리즈 <닥터 켄>이 시즌2까지 방영되는 등 산업 내의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스티븐 연이 <워킹 데드>의 글렌 역할로 인기를 끌어 예정된 회차보다 오래 출연하고, 대니얼 헤니가 <크리미널 마인드> 시리즈에 출연하는 등 이전부터 꾸준히 이어진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이 올 8월을 #AsianAugust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할리우드에서는 이 영화들의 흥행을 지금은 극장에서 보기 힘들어진 중간 규모 영화들이 부활하는 조짐으로 읽고 있다. 로맨틱 코미디, 스포츠영화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최근 극장 개봉을 목표로 제작되는 영화들은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지는 공포·스릴러 장르이거나 프랜차이즈로 이어져 대박을 기대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들뿐이다. 하지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흥행, <서치>에 대한 호평과 기대,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 쏟아진 호평 등은 그동안 할리우드가 소외시켰던 중간 규모의 영화들이 여전히 극장이라는 개봉 시스템을 통해 관객과 만나고 흥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AsianAugust가 가지는 의미, 그리고 이 영화들의 흥행이 가져다줄 더 큰 의의에 대해서는 <서치>의 주연배우인 존 조가 남긴 코멘트로 대신하고 싶다. 한국계 미국인인 가수 에릭 남이 형제들과 함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가 상영되는 애틀랜타의 한 상영관 표를 모두 구매해 영화를 지지한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는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헨리 골딩과 존 추 감독 역시 곧 개봉하는 <서치>의 상영관 한관 전체 표를 구매해, 비슷한 시점에 개봉을 맞이한 동료 아시아계 배우와 감독의 영화를 지지했다. 이에 인도계 미국인인 <서치>의 아니시 차간티 감독은 “당신들은 정말 미쳤고(crazy) 부자(rich)군요”라고 위트 있게 답했고, 존 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영화 <서치>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 모든 차별이 마치 지나간 과거처럼 느껴지게 하는 , 미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서치>는 영화에서 내가 연기한 데이빗 김이라는 캐릭터가 아시아계 아메리칸인 이유, 그중에서도 한국계 미국인인 이유에 대해서 특별히 설명하지 않으며 또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내게 <서치>는 그래서 이 길고 긴 (차별) 이야기의 가장 멋진 종결이다.” 관객이 제2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를 보기 위해 또 다른 25년을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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