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평론①] 우수상 김병규 이론비평 요약 - 액체적 영화에 관하여
2018-09-12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구스 반 산트의 두 편의 영화, <엘리펀트>(2003)와 <라스트 데이즈>(2005)에선 한 가지 기묘한 효과가 반복된다. 그 효과가 나타나는 장면들의 시각적 구성을 요약하면 이런 식이다. ‘한 남자가 홀로 걸어가고 카메라는 그의 뒤를 따라간다.’ 두 장면이 제시되는 상황이나, 카메라가 따라가는 인물들에게 별다른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엘리펀트>에서 해당 장면은 두 소년이 총기 난사를 저지른 이후에 등장하고, 카메라가 따라가는 인물은 그중 한 명인 알렉스이다. 반면 <라스트 데이즈>에서 카메라 앞을 걸어가는 남자는 주인공 블레이크이며, 그는 지금 마약에 취한 채로 새벽이 돼서야 집에 돌아오는 중이다.

여기까지는 달리 특별한 것 없는 장면들이며, 단순히 ‘대상의 뒤통수를 따라가며 찍었다’는 특징은 공통되는 장면을 교집합으로 묶어내기 민망할 정도로 빈번하게 사용되는 촬영 방식이다. 두 장면을 눈에 띄게 이상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걸어가는 순간에 공통적으로 들리는 물소리이다. 인물들이 움직이는 장소는 총기사고가 발생한 학교(<엘리펀트>)와 집 앞의 거리(<라스트 데이즈>)이므로 물소리가 들릴 만한 배경으로는 적절치 않다. <엘리펀트>의 알렉스도 물소리가 들리자 걸음을 멈추고 의아하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본다. 그런데도 구스 반 산트는 이 장면들에 선명히 물소리를 삽입해두었다. 이 소리는 ‘어디에서’ 들리는 걸까. 인물과 관객은 그 소리를 어떻게 듣는 걸까.

한 가지 단서는 두 영화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효과가 이 장면들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스트 데이즈>의 도입부, 블레이크가 강을 건너 카메라 앞쪽으로 걸어오는 장면에서 물소리는 과도하게 들려온다. <엘리펀트>에서 에릭과 알렉스가 잠들어 있는 동안 창문 바깥에선 천둥과 함께 빗소리가 들린다. 구스 반 산트의 또 다른 작품인 <제리>(2002)의 사막의 풍경과 <엘리펀트>에 등장하는 비디오게임 속 그래픽으로 그려진 사막의 이미지가 별다른 서사적 연관성 없이도 시각적으로 공명하는 것처럼, 각 영화에서 액면 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두 장면은 물소리라는 디제시스 바깥의 음향을 통해 접속한다.

소리를 배치한 의도에 대해 의미론적인 해석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흥미롭지 않다. 매혹적인 건 구스 반 산트가 물소리라는 외재음을 통해 화면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노출한다는 점이다. 「허구와 재현 불가능한 것: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라는 글에서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적한 대로 영상과 소리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영화 매체에서 소리는 영상에 복무하는 도구가 아니며 영상과는 별개의 지층에서 운용되는 독립적인 성분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분리와 간극을 내재한다. 구스 반 산트는 상황의 개연성과는 무관하게 들려오는 물소리를 기입하면서 프레임의 경계를 교란하고 영화의 내적 요소 간의 연계를 구축한다. 픽션은 화면 내부의 단일한 완결성으로 완료되는 않으며 장면과 장면이 복합적으로 교통하면서 여러 차원으로 분화한다.

동시대의 영화를 기준으로 구스 반 산트의 사례가 특권적인 것은 아니다. 물소리, 혹은 물, 나아가 액체의 형상을 주요한 제재로 차용하고 그것의 성질을 빌려 특수한 픽션의 조건을 성립시키는 21세기의 영화를 떠올려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를테면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2014)의 결말에서 19세기 아르헨티나와 현재 시점을 연결하는 과격한 디졸브는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호숫가가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2015)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동행하는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가 해안이라는 건 우연일까. 조너선 글레이저의 <언더 더 스킨>(2015)에서 외계인이 남성을 포획하는 공간은 왜 끈적끈적한 액체로 이루어져 있을까. <친애하는 당신>(2001)에서부터 <열대병>(2004)을 거쳐 <엉클 분미>(2010)와 <메콩 호텔>(2012), <찬란함의 무덤>(2015)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정글 속의 물가로 향해 그곳에서 발생하는 신비와 마술적 현상에 몰두하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계는 어떤가. <엉클 분미>에서 영화에 느닷없이 끼어드는 공주와 메기의 에피소드는 현생과 전생, 현실과 설화, 인간과 동물, 표면과 이면, 피안과 차안 등 지극히 아핏차퐁적인 주제가 집약된 실험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시퀀스의 배경은 당연하게도 작은 물가이다. 수면에서라면 인물의 형상이 둘로 분리되고 인간과 생선이 성교를 나누는 기이한 현상도 자연스럽게 수용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액체의 이미지가 동시대 영화에서 새롭게 출현한 것은 아니다. 영화사를 통틀어 바다와 강이 나오는 장면은 무수히 많이 촬영되었고, 필름누아르와 호러를 비롯한 수많은 장르영화들은 비가 내리고 피가 흐르는 광경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차이는 분명하다. <라쇼몽>(1950)의 구로사와 아키라가 세상을 잠겨버릴 듯이 비를 뿌려대고, 스탠리 큐브릭이 <샤이닝>(1980)에서 호텔 복도 위로 무지막지한 양의 피를 쏟아내도 공간의 물질성은 굳건히 정지해 있었다. 그러므로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았을 때 “도저히 모르겠다.”라고 중얼거리던 사내는 나생문의 구석에서 갓난아이를 발견하게 되고, 호텔 복도에 흩뿌려지는 피는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이다. 반면 21세기에 출현한 일군의 영화들에서 액체의 위상은 이와 다르다.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물은 벽을 뚫고 외부로부터 내부의 공간으로 침투하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 강가는 이전까지의 ‘나’와 전혀 다른 인물로 변태하는, 일종의 환생을 경험하는 장소이며,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에서 해변은 픽션과 다큐멘터리, 영화의 아카이브와 회화의 이미지와 현실의 기록이 끊임없이 교착하고 길항하는 다면의 세계를 내장한다. 섣불리 단언하자면 현대영화는 액체적이다.

‘액체적’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영화에서 액체의 이미지와 배경이 등장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그러니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2017)처럼 물을 서사적 소재로 사용할 뿐 액체의 속성을 영화적 형식으로 번안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례는 거론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것은 21세기의 몇몇 영화들이 지향하곤 하는 공간적 감각에 대한 은유이다. 선형적인 서사의 질서와 일관된 구조의 체계는 액체적 현상에 의해 허물어진다. 액체성의 침범은 눈앞에 펼쳐진 화면 내부의 고정점을 무너뜨리고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강렬하게 암시한다. 액체적 공간이 눈에 비치지 않는 외부, 다름 아닌 프레임 바깥의 세계를 유입하는 경로로 기능하는 것이다. 바다 또는 물가와 같은 장소에 도달하면서 카메라는 내부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바깥의 광경이 맹렬히 밀려 들어오는 현상을 마주한다. 인물이 그런 장소에 도착함에 따라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다른 세계의 존재가 프레임의 시야에 들어와 버리고, 외부 세계의 질료들이 안쪽으로 틈입하면서 안정적으로 보이던 내부에 돌연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덧씌워지는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 전쟁>(2005)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레이첼이 강물을 바라보는 대목이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수면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내뱉으려는 찰나 불현듯 화면의 오른편에서 강물을 타고 시체가 떠내려온다. 레이첼은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곧이어 수십 구의 시체더미가 강 저편에서 우수수 흘러오는 경악스러운 광경이 펼쳐진다. 세계를 마주본다는 행위에 깃든 매혹과 공포가 한몸으로 엉겨 붙은 압도적인 장면이다. 가로축으로 끝없이 이어진 강줄기는 가늠할 수 없이 거대한 규모로 자행된 ‘바깥’의 폭력과 죽음을 ‘안’으로 들여와 우리의 눈에 직시되게끔 한다. 바깥의 폭력이 종결되지 않는 이상, 안전을 확신할 수 있는 내부란 없다. 수평으로 지속되는 강물의 무심한 흐름은 공포가 멀리 떨어져있기는커녕 언제든지 우리의 눈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우리를 더욱 불안에 빠트리는 것은 인물이 머무는 내부와 액체가 틈입해 들어오는 외부라는 규정 자체를 무효로 하면서 혼란과 모호함으로 향하는 일련의 영화들이다. 차이밍량의 <떠돌이 개>(2013)에서 맹렬히 쏟아지는 비와 범람하는 강물은 집 안으로 스며들어 실내 곳곳에 곰팡이를 피우며 사방에 습기를 퍼트린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리얼 완전한 수장룡의 날>(2014)에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실내는 과도한 물로 가득 채워지고 아이들은 바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다. 이런 이미지들을 마주하면서 느끼는 심상치 않은 정서는 다음과 같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이미 액체로 둘러싸인 심연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까. 내부와 외부를 결정짓는 경계의 규범은 사라져버렸고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우리의 안전을 확증해주는 내적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홍상수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의 영희가 해변을 바라보며 발산하는 정념도 이와 유사한 것이다. 함부르크에서도, 강릉에서도 그녀의 고립과 고독은 해소되지 않는다. 해변의 끝으로 향한다면 죽음이 다가올 테지만, 해변을 벗어난다고 해서 죽음 같은 고독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영희는 해안가를 사선으로 걷는다. 그녀는 죽음을 택하지도, 삶을 추동하지도 않는다. 내부와 외부의 규정이 사라진 무대에서 지속할 수 있는 건 어느 쪽으로도 방향을 결정하지 않는 발걸음의 움직임밖엔 없을 것이다.

범람하는 물의 이미지에 대한 두 거장의 서로 다른 진단이 있다. 장 뤽 고다르는 <필름 소셜리즘>(2010)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서 수많은 사람을 태운 크루즈 유람선에 올라탄 흑인 여인의 입을 빌려 노래한다. “불행한 유럽이여, 고뇌에 의해 정화되기보다는 고통에 상해가는 유럽이여. 되찾은 자유에 고양되지 못하고 도리어 모욕당하고 있구나.” 고다르 특유의 유비적 사유체계를 생각해보면 그가 유람선과 유럽을 영화에 빗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필름 소셜리즘>에서 영화는 바다의 어둠을 제대로 응시할 수도, 여정의 방향성을 예측할 수도 없는 이중의 암흑에 놓여 있다. 반면 고다르와 같은 나이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역설적으로 어둠에 휩싸인 영화가 빛을 밝히는 기적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 기적이 발생하는 장소가 되는 것은 또한 물 위에서 가능하리라는 견해를 내비친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2016)의 설렌버그는 추락하는 항공기를 강 위에 불시착시키는 선택을 수행함으로써 탑승객 전원을 구조해낸다. 허드슨강의 수면 위로 떠오른 항공기의 형상은 기적을 주재하는 단 하나의 영화적 현신이다. 액체성의 무대는 영화에 부여된 불완전함과 제한적 상태를 드러내는 곤경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현대영화의 가능한 윤곽을 모색하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21세기의 ‘종말영화’란 액체의 범람에 휩싸이는 영화라기보다는 액체성의 소진을 주지하는 영화를 뜻한다. 종말의 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집 앞의 우물물이 마르고 두 남녀가 익히지 않은 감자를 생으로 먹으려는 장면에 도달하는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2011)을 실로 반영화적인 영화, 우물이 말라가듯 영화의 속성을 서서히 연소해버리는 과정의 영화라고 말할 순 없을까. 혹은 아벨 페라라의 <4:44 지구 최후의 날>(2011)에서 지구 종말을 앞두고 거실 한복판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뒤, 이를 선풍기와 드라이기로 말리는 작업 과정이 묘사되는 까닭은 종말의 절차를 액체적 세계에서 고체적 세계로의 이행으로 해석하는 한 언더그라운드 예술가의 심상을 포착하기 위함이 아닐까(TV와 아이패드와 스카이프를 비롯한 각종 디지털 모니터가 등장하는 이 영화는 전자 스크린의 ‘메마른’ 감각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액체성이 부재하다면 파국의 징후는 눈에 보이지 않을 테지만, 영화를 지속시키는 긴장과 유혹도 없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편의 종말영화는 물리적인 외부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외부로 탈출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등장한다. 바깥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허락될 수 없다면, 내부에 남은 것은 픽션의 소멸과 ‘끝’의 시간뿐이다.

뒤집어 말하면 액체적 세계란 ‘끝’의 시간을 유예하면서 미완의 상태에 대한 자각을 지속적으로 요청하는 영화적 이행의 무대이기도 하다. 미셸 투르니에의 말처럼 세계의 풍부함은 언제나 인식 바깥에 있다. 영화를 지속시키는 건 그런 변모의 움직임이다. 복수의 장면을 조합하는 것으로 발견되는 원소의 변형은 이처럼 고정되지 않는 영화의 탄력적인 육체를 불연속적인 몽타주의 원리로 표상한다. <라스트 데이즈>의 도입부에 등장한 폭포가 후반부의 한 장면에서 물소리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엘리펀트>에서 창문 너머로 들려오던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학교 복도에서 들리는 물소리로 변주되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먹구름의 형상으로 변모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질료는 끝없이 순환하고 중첩되고 유동한다. 제임스 베닝의 <루르>(2009)의 마지막 장면 속 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리산드로 알론소의 <자유>(2001)의 강에서 벌목한 땔감으로 타오르는 불꽃의 연기는 불타오른 뒤 재로부터 다시 소생하는 영화의 리듬을 표상한다. 불과 연기와 물을 오가는 물질의 유동성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액체적 현상이다. 액체적 영화의 특성이란 모든 것을 소진해버리는 물리적 시간의 냉엄함에 저항하는 미완의 감각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파이브>(2005)는 순환과 중첩과 이동의 매혹이 한데 담긴 액체적 영화의 사례다. ‘오즈에 대한 헌정’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영화는 고작 다섯 개의 장면(해안가를 배경으로 나무토막이 파도에 휩쓸리는 첫 장면, 사람들이 거니는 두 번째 장면, 개들이 천천히 돌아다니는 세 번째 장면, 오른쪽으로 걸어가던 오리 떼가 다시 왼쪽으로 걸어오는 네 번째 장면, 그리고 물에 비친 달빛의 모습을 담아낸 다섯 번째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말로 영화의 구성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파이브>에 담긴 비범함에 조금도 다가갈 수 없다.

7분 40초가량 이어지는 첫 장면을 들여다보자. 장면을 구성하는 세부는 다음과 같다. 파도에 휩쓸려 굴러다니던 나무토막은 어느 순간 두 도막으로 쪼개지더니 그중 한 부분이 프레임 바깥으로 벗어난다. 카메라는 영리하게도 둘로 나뉜 나무토막을 동시에 담아내기 위해 어설프게 이동하려 들지 않는다. 움직임을 최소화한 카메라는 화면 바깥으로 사라진 나무토막이 어느 순간 프레임 후경의 바다 위에 넘실거리면서 화면에 복귀하는 사물의 이동을 목격하게 된다. 첫 장면은 프레임 안팎을 오가던 나무토막이 바다로 떠내려가 화면 상단으로 완전히 사라지면서 끝난다. 영화가 지켜본 것은 파도의 고유한 흐름과 나무토막이라는 물질이 충돌하면서 생성되는 세계의 리듬이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진 카메라(라는 프레임)의 사각형은 그 세계의 리듬에 동선을 부여하고 화면의 서스펜스를 구성한다. 파도와 부딪히면서 수직 운동을 지속하던 나무토막이 화면의 가로축으로 프레임에서 벗어난 뒤, 다시 화면에 돌아와서는 세로축으로 (재)이탈해버리는 그 유려한 자리바꿈의 운동에 이 영화의 매혹이 응축되어 있다.

<파이브>는 얼마 동안의 해안가 풍경을 지나쳐 마지막 장면에서 호수로 향한다. 지난 네 개의 장면, 그중에서도 특히 두 번째에서 네 번째 장면까지 영화는 지극히 평면적인 구도를 설정해두었다. 지면과 바다와 하늘로 이루어진 화면은 2차원적이며, 프레임 내 피사체(사람, 개, 오리)의 움직임은 오로지 횡적인 이동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다섯 번째 장면은 몹시 요란할 뿐만 아니라 시청각적인 질료들이 만들어내는 활동의 집합으로 북적거린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로 시작되는 다섯 번째 장면이 열리면 어두운 호수에 비친 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곧이어 수면의 파동으로 인해 화면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더니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호수의 표면 위로 쏟아진다. 비가 그치면 수면엔 다시 달의 형상이 비치고 물 위로 정체 모를 이물질과 벌레들이 떠다닌다. 이내 구름이 나타나 물에 비친 달을 가리고 완전한 어둠을 드리운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 어둠이 걷히고 빛이 새어 들어오면서 새벽의 어스름한 풍경이 펼쳐지면 영화는 끝난다. 물론 이런 변화무쌍한 자연 현상이 하나의 컷 안에서 차례로 나타난 것은 아니고, 몇 개월에 거쳐 촬영된 복수의 장면들을 이어붙인 결과라고 한다.

처음 이 장면을 보면서 관객은 수면에 반사된 희미한 달의 모습을 보며 영화의 공간을 수직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스크린을 마주하면서 단순히 물의 표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물위에 맺힌 달을 인식하고 입체적 공간에 대한 상상을 시각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 표면에 비친 상을 통해 관객은 화면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를 발견한다. 표층을 넘어서는 이미지의 연상 작용이 관객의 머릿속에서 작동하면서 영화의 화면이 건축적 구조를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수면 위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달이 자리한 하늘에서 내리는 비(타르코프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지와 하늘을 잇는 선’). 화면에는 달을 비추는 물의 반사 효과가 사라지고 쏟아지는 비와 호수의 표면만이 남는다(관객은 이를 섬광처럼 내리치는 번개의 조명효과를 통해 부분적으로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이미지의 피상으로 복귀한다.

반복하건대 숏이 시작되는 순간에 이 장면의 프레임은 표면적이되 입체적이다.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단지 호수의 수면이지만, 거기에는 달의 일렁임과 밤하늘의 정경이 깃들어 있다. 비가 내리고 풍경이 요동치면서 장면은 입체적이되 표면적인 구도로 뒤집어진다. 쏟아지는 비의 수직 운동과 번개의 침입은 3차원의 입체 공간에서만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영화의 화면은 지난 세 장면과 마찬가지로 2차원적인 평면의 구도로 환원된다. 소나기가 그친 뒤 영화는 비로소 두 가지 상태를 조합해낸다. 다시 수면 위로 보이는 달의 모습은 세계의 입체적 부피를, 물의 표면 위를 떠다니는 이물질과 벌레는 화면의 표층적 지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영화란 평면(‘컷’)의 연속으로 공간을 구축해내는 작업이라는 명제를 일순간 납득시켜버리는 감동적인 체험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스크린에 영사되는 것은 여전히 평면이지만, 그곳엔 공간에 관한 감각이 부드럽게 체화되고 있다.

<파이브>의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키아로스타미가 만들어낸 가장 야심 찬 순간이라 부를 만하다. 소나기가 물 위로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파장은 스크린의 표면과 입체적 세계라는 구도와 역구도를 충돌시킨다. 그 충돌의 운동은 단일한 숏 내부에서 현실의 질료와 픽션적 배치를, 2차원의 평면과 3차원의 현상을, 미장센과 몽타주를 가로지르는 대담한 시도를 무대화한다. 하나의 장면 안에서 내부와 외부의 영역은 서로 중첩되고 부분적으로 교통한다. 마지막 장면에 도달했을 때, <파이브>는 프레임 안과 밖을 오가며 발생하는 유동적인 활동을 수용함으로써 다중적 세계의 집합을 하나의 장면에 공존시킨 액체적 숏을 창출해낸 놀라운 사례로 기록된다.

고다르의 바다가 절망 어린 탄식과 신음이라면, 이스트우드의 강이 희망의 암중모색이라면 키아로스타미의 호수는 굴절되고 충돌하는 영화적 운동의 과정 그 자체다. 키아로스타미라면 직선적인 경로를 따르는 일관된 흐름이 아닌 일탈과 파문을 일으키는 액체적 움직임의 몸체에 영화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화면 바깥으로의 탈선을 지향하는 움직임은 프레임이라는 영화의 공간에 근원적으로 잠재된 운동성이기도 하다. 그런 바깥으로의 방향성은 영화사의 기원에 해당하는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감각이다. 최초의 영화 중 한 편으로 알려진 <열차의 도착>,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같은 영화에서 장면이 시작되면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과 공장 문을 나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화면 바깥으로 사라져간다. 외부로 향하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카메라라는 매개를 넘어선 존재론적 외부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른다. 21세기의 액체적 영화는 영화사의 시작점에서부터 기록되었던, 그러나 지난 세기의 영화가 전면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던 누락된 감각을 급진적으로 복권하는 시도인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영화란 정상적 궤도에서 이탈하는 모든 움직임의 총체를 일컫는 용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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