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짐 자무시의 영화는 산책자를 닮았다. 느긋하고 관찰자적이며 무언가에 고요히 취해 있다. 느슨한 제스처와 매끄러운 결로 그의 영화는 우리를 살포시 잡아끈다. 그런데 자무시의 영화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려 하면 그건 의외로 까다로운 작업이 된다. 부드러움과 완고함, 쓸쓸한 정조와 소박한 떠들썩함을 동시에 품은 세계는 쉬이 단언을 허용하지 않는다. 유쾌한데 한편으로 우울하고, 아름다운데 다시금 슬퍼지는 영화를 보며 파생되는 양가적인 감정을 몇 마디로 묶어내는 건 어렵다. 가령 <지상의 밤>(1999), <커피와 담배>(2003)와 같이 유난히 수다스러운 영화가 말을 멈추며, 술에 취해 주저앉거나 단잠에 빠져드는 늙은 노동자를 마지막으로 비출 때 찾아드는 고요함이 가슴을 울려버리는 순간을 간명하게 표현하기는 힘들다. 혹은, <브로큰 플라워>(2005)처럼 수많은 기표들을 흩뿌려놓고도 의미를 거둬들일 생각이 없는 영화를 보며 난감해지는 경우도 있다. 숨겨진 아들을 찾아 돈(빌 머레이)은 분홍색 기표의 소국으로 떠밀려 다니지만, 결국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한 채 희극과 비극의 중간지대에서 어정쩡하게 멈춘다. 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 앞에서, 인생이란 원래 희극과 비극 사이에 놓인 법이지, 하고 거드름이라도 피우며 서글픔을 덜어내고 싶은 영화 앞에서 과연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말하고자 하는 욕망은 언제나 언어의 무능함을 외면하고선 제 갈 길을 가려한다. 그러니 마저 얘기해 보자. 널리 알려졌다시피 <커피와 담배>는 자무시가 1986년부터 틈틈이 찍었던 열한 개의 단편을 엮어낸 영화다. <지상의 밤>은 동시간 다섯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복합적인 감흥을 곱씹으며 두 작품이 공유한 에피소드 구성방식을 간과할 수는 없을 테다. 제각각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니 필연적인 반응 아니겠냐고. 그렇긴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다른데 있는 것 같다. 자무시는 말의 내용만큼이나 대화의 리듬에 주목한다. <커피와 담배>에서 대화들은 대게 헛돈다. 커피와 담배를 사이에 두고 떠들어대는 인물들은 사실 대화라고 보기 힘든 혼잣말, 리액션 없는 씁쓸한 활동 사이에서 소통이 아니라 어색한 제스처를 공유한다. 그러니깐 막무가내로 쏟아내는 그들의 말들과 어색한 침묵 안에서 우리는 키득거리며 웃다가도, 빠르게 고립되는 말들과 느릿하게 지속되는 침묵 사이에서 쓸쓸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반면 <지상의 밤>의 대화들은 대부분 겉돈다. 택시기사와 승객으로 만난 인물들이 서로를 향해 질문하고 반응하며 대화를 이어가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다른 생활 속도를 지닌 사람들이다. 동일한 택시를 타고 동일한 속도로 목적지를 향해 간다 해도 각기 다른 삶의 리듬을 지닌 개별자다. 특히 삶의 속도가 다르기로는 로마의 인물들이 단연 일등인데, 역주행도 서슴지 않는 택시기사를 연기한 배우가 빛의 속도로 떠들 수 있는 로베르토 베니니이고, 승객이 고대의 도시만큼이나 오랜 침묵에 단련되어 있을 신부라면 둘의 상황은 안 봐도 본 것 같지 않은가. 이외에도 LA, 뉴욕, 파리, 헬싱키의 택시 안은 묘하게 어울리고 어긋나는 대화들로 엇박자를 낸다. 할리우드의 급박한 생활을 허겁지겁 살아가는 여인과 소박한 꿈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여인이 동행하는 LA, 동독에서 이제 막 이주해 모든 게 서툰 택시 기사와 세상 물정에 훤한 흑인 청년이 좌충우돌 교감하는 뉴욕, 눈은 멀었지만 무엇이든 느낄 수 있는 여인과 두 눈 번쩍 뜨고도 삶의 고단함 때문에 한 치 앞을 못 보는 기사가 동행하는 파리, 서로 불행하다고 아우성치는 노동자들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헬싱키의 택시는, 저마다의 밤을 달린다.
그리고 세상의 거대한 순환 안에서 함께 흐른다. 저마다의 깊고 어두운 밤은 마치 하나의 밤인 것처럼 해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 찾아와 여명이 밝아올 때 물러간다. 다섯 도시는 지구상에 공존하며 서로 다른 (표준)시각에 ‘동일한 밤’을 보내고, 관객은 다섯 도시들 사이를 떠돌며 ‘하나의 밤’을 지새우게 된다. 하나의 밤은 수많은 리듬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삶이다. 각기 다른 리듬을 지닌 인물들이 접촉하며 형성하는 ‘부정형의 리듬’, 함께 택시를 타고 도시의 거리를 달릴 때 발생하는 ‘선형적 리듬’, 자전하는 지구의 ‘순환적 리듬’, 이들 사이에서 반응하는 우리의 ‘감정적 리듬’이 만나서 이루는 동시적인 삶이다. 이는 이미 여러 작품을 통해 경험해 왔고 기억해야 하는 짐 자무시의 세계관이다. 일상의 반복과 차이, 변주를 통해 영화의 구조를 쌓아 올리는 그의 대표적인 양식은 이러한 세계관의 반영이고 실천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영화에 완결이 없고, 절대적 충만함이나 고독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당연한 수순인 것 같다. <커피와 담배>, <지상의 밤>의 피로한 노동자들을 고요히 비추는 마지막 장면들처럼 말이다. 영화를 들썩이게 하던 수많은 리듬이 잠잠해지면, 인물들이 앉아있는 일터의 한 구석과 눈 쌓인 거리는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인물들은 끈질기게 세상에 상존해 있고, 세상 어느 정확한 장소가 아니라 장소들 사이 혹은 차원들 사이를 부유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단잠에 막 빠져들 무렵의 삶과 죽음 사이 같은 깨어있음과 잠듦 사이고, 세상이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어디의 리듬에도 반응하지 않고 아주 잠시 멈춘 것 같은 지상의 밤과 아침 사이다. 그곳의 고요는 한없이 쓸쓸하고 애잔하다. 그런데 더없이 편안하기도 하다. 그 순간의 고요함은 내가 어떻게 호흡하고 흐느끼고 있는지, 나의 리듬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고스란히 인식하게 만든다. 관객인 나의 자리가 있기 이전에 고요함 앞에서 몸의 리듬을 먼저 확인한 이는 감독 자신이었을 것이다. 짐 자무라는 이 세상의 ‘세심한 관찰자’이자 ‘적극적인 반응자’는 그렇게 우리를 그의 자리로 부드럽게 이끌고 간다.
2. 그의 영화는 세상의 모든 작은 존재들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반응한다. 익히 알고 있듯 자무시는 소소한 존재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비추며 순환구조를 만들어 낸다. 그의 형식에는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상통하는 세상의 보편적인 원리가 있다. 세상 어느 경우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반복은 없으니 동일한 존재들이 만나 관계 맺고 헤어지는 과정이 순환하더라도 그 사이에서 차이가 발생한다는 게 그것이다. 자무시는 그 단순한 원리를 바탕으로 신비로울 만큼 아름다운, 작은 존재들의 윤무를 만들어 낸다. 이는 진부하긴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패터슨>(2016)의 주인공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의 일주일은 일상적인 순간들의 아름다운 윤무로 채워지지 않았나. 그리고 일상이란 부정형의 리듬으로 채워진 하루하루가 선형적으로 나아가다 보니 비슷한 패턴으로 순환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자신만의 규율과 유랑자의 초연함을 동시에 견지한 자무시의 영화는 일상에서조차 미스터리한 순간을 돌출시켜 낸다. 우리는 <패터슨>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하지만, 이 영화가 왜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아름다움이란 거대한 주제를 논하려는 게 아니다. 주관적인 심상을 해석하거나 해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무시의 영화가 갈수록 형용하기 힘든 아름다운 무언가에 닿고 있는데, 그런 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살펴봐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패터슨은 자무시의 다른 인물들처럼 여행하지 않음에도, 유랑자의 리듬을 지니고 있다. 그의 노동엔 산책자의 것과 비슷한 부정형의 리듬이 흐른다. 그가 운전하는 버스는 매일 같은 장소를 달리지만 승객들의 수다와 조금씩 다른 창밖 풍경들로 인해 노동의 일상은 매일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반면 시를 쓰는 작업엔 오히려 보통의 노동처럼 규칙적인 리듬이 흐른다. 음악이 들려오고 패터슨이 시를 읊조리면 몽환적인 화면 위로 시가 쓰인다. 음악과 시와 풍경이 유유히 어우러진 장면들은 나른하고 최면적이다. “자극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에 대한 해독제 같은 작품이 되었으면 했다”는 자무시의 말처럼 <패터슨>의 매 장면은 느긋하고 조화로운 리듬으로 우리를 진정시킨다. 그러니 우리는 패터슨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광경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오직 사랑하는 이를 향한 시, 사소한 존재들과 교감하며 탄생하는 패터슨의 시가 아름답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보다는 시를 쓰는 행위와 일상의 삶이 자연스럽게 교합되는 순간들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물 패터슨과 도시 패터슨이 합일된 하나의 존재 혹은 세계처럼 느껴진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패터슨의 시와 관련된 시간보다 그가 깊게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다르게 말하면 패터슨이 시로 옮길 수 없는 순간들에 더 끌린다. 패터슨의 시는 관찰과 사색에 의해 탄생한다. 성냥, 맥주,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 계절과 날씨, 세상의 차원 등 패터슨이 사랑하거나 반복적인 생활 속에서 천천히 들여다보는 존재들은 모두 그의 시가 된다. 작은 존재들에 대한 감응을 운율에 맞춰, 또는 운율에 조금씩 어긋나게 시어로 옮기는 작업을 그는 매일같이 반복한다. 하지만 그가 시로 옮길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패터슨 스스로가 취하는 찰나적인 제스처다. 그 스스로는 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보는 이로서는 그의 사소한 제스처에 마음이 요동친다.
패터슨의 버스가 고장 난 금요일 오후, 그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그날은 버거울 정도로 피로한 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패터슨은 거리의 부랑자를 보자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 쥐어준다. 그리고서 다시 터덜터덜 걷는다. 그때 화면 전경에 위치한 풀숲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튀어나와 옆에 서있는 나무 위로 재빠르게 오른다. 패터슨 너도 봤어? 속으로 외치기가 무섭게 패터슨의 걸음이 빨라지면서 다람쥐를 좇아 나무 위를 쳐다본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 장면들에선 패터슨의 품성과 기질이 그대로 드러난다. 피로함에 지쳤을 텐데도 풍겨 나오는 선한 품성과 세상의 적극적인 반응자로서의 그의 기질은 그것만으로도 감동적이다. 하지만 패터슨 스스로는 그가 지닌 감동적인 면모를 시에 옮길 수 없다. 대신 그의 면모를 쏙 빼닮은 데다 직관력까지 갖춘 영화는 그 순간의 패터슨을 담는다.
그 순간이 영화는 되지만 패터슨의 시가 될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패터슨에게만 속한 것이 아닌, 스크린 안과 밖에서 즉각적이고 정직하게 일어나는 상호 작용 때문이다. 다람쥐가 잽싸게 튀어나오자 스크린 바깥에선 작은 다람쥐 한 마리 때문에 안달하게 되고 스크린 안에서도 그 사소한 존재의 미약한 움직임에 곧장 반응한다. 자무시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 한 다람쥐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패터슨의 감정적 리듬을 흩뜨려 놓고, 패터슨과 함께 축 쳐져있던 보는 이의 마음에도 짧지만 깊숙한 울림을 만든 것이다. 고요를 깨뜨리는 아주 짧은 순간의 활기는 어떤 견고한 서사와도 바꿀 수 없는 동화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다람쥐의 움직임은, 패터슨이 비밀 노트를 잃고 상심에 젖어 조용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일요일 오후, 일본 시인이 건넨 정체모를 감탄사 “아하”와도 닮았다. 짧은 감탄사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패터슨과 일본인의 대화 사이에서 특유의 경쾌함으로 어색한 장단을 맞춘다. 그리고선 일본인이 떠난 후 패터슨의 입으로 옮겨가 “아하”하고 다시 나오며, 세상과 패터슨 사이에 놓여있던 보이지 않던 장막 하나를 걷어낸다. 세상의 리듬과 패터슨의 호흡이 다시 어울리기 시작하고 시는 다시 쓰인다. 자무시의 세상에선 고요함이 각자의 호흡을 되돌려 주기도 하고, 지나쳐가는 작은 존재 하나 짧은 감탄사 하나가 관계들 사이에 놓인 장벽을 부드럽게 걷어내 버리기도 한다.
3. <패터슨>의 세상엔 저들처럼 사소하지만 놀라운 존재가 또 하나 있다. 기울어진 우체통. 금요일의 버스가 고장 나는 신과 패터슨의 귀갓길 사이엔 우체통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장면이 배치되어 있다. 패터슨의 일과 중 하나는 기울어진 우체통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일을 마치고 패터슨이 귀가하면 집 앞의 우체통은 어김없이 기울어져 있다. 우리는 묻게 된다. 저 우체통은 왜 기울어져 있을까. 패터슨도 그게 의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패터슨은 로라에게 묻지 않는다. 패터슨은 탐색자가 아니다. 그는 수용자다. 시인으로서 그의 재능은 해답을 찾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현상에 반응하는 것이다. 기울어진 우체통에는 관객으로서도 알지 못했던 반려견 마빈의 시간이 관여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면 마빈은 우체통을 툭 밀쳐놓고 재빨리 귀가했던 것이다. 그러니깐 패터슨이 우체통을 바로 세우는 시간엔 마빈의 미지의 시간이 작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마빈과 패터슨 두 개별자의 시간이 우체통 앞에서 비밀스럽게 만나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침부터 모든 게 조금씩 어긋나던 금요일만은 다르다. 우체통은 다름없이 기울어져 있지만 평소와 달리, 영화는 패터슨이 우체통을 바로 세우는 행위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음 날 우체통이 바르게 서있으니 패터슨이 그것을 세웠을 테지만 그 과정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이 날의 부정형적 리듬은 그대로 유지된다. 금요일은 다른 날들의 일상이 완전히 변주되는 날이다. 패터슨보다 로라가 먼저 일어나고, 동료 도니는 가정사를 하소연하지 않고, 버스는 고장 나며, 바에선 며칠 동안 옛 여자 친구에게 질척거리던 에버렛이 고무총으로 자살소동을 벌인다. 모든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지만 잠재되어 있던 여러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단순하게는 반복되는 일상이 순환할 때 조금씩 드러난 차이가 점점 커지면서 이 날 하루 동시에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패터슨은 피로했을지 모르고, 도니는 하소연하는 일에 지쳤을지 모르고, 버스는 연식이 오래됐고, 에버렛의 간절함은 날이 갈수록 커졌을 것이다. 그런데 에버렛이 소동을 벌이는 바의 상황은 조금 복잡하다.
우리는 패터슨이 밤마다 들르는 바에 명예의 벽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바의 주인 덕은 패터슨에게 명예의 벽에 올릴 패터슨시 출신의 위인들에 대해 의견을 묻곤 한다. 덕과 패터슨만의 유희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런데 금요일 밤은 에버렛이 자살 소동을 벌이며 난데없이 패터슨시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패터슨의 버스에서 들려오던 대화 중 유명 복서 허리케인 카터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는 술집에서 총으로 사람을 쐈다는 누명 때문에 오랜 시간 옥살이를 했다. 또한 아나키스트 게타노 브레스키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는 수감된 감옥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는데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에버렛은 지금 사랑 때문에 절절한 쇼를 벌이는 중인데, 하필이면 허리케인 카터의 누명과 케타노 브레스키의 최후가 합쳐진 형태로 벌이고 있다. 사실 소동의 형태는 예전 사건들과 상관없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안일하다. 그러니 버스 안의 대화와 소동의 형태를 결부시키는 건 어리석고 과격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버스 안에서 들려오던 이야기들이 세상을 유랑하다가 패터슨시의 작은 박물관인 덕의 가게에 들러 에버렛과 과격하게 소통하는 중이라고. 그러다 보니 우연히 과거 군인이었던 패터슨의 놀라운 제압술을 들춰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날 아침 패터슨이 썼던 시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옆으로 비켜 선/수많은 분자들을/뚫고 지나간다/양쪽으로/더 많은 분자들이/기다리고 있다”에 등장하는 분자들의 유동적인 움직임처럼, 이야기도 어딘가로 흩어졌다가 패터슨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다시 그를 찾아와 그의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이다. 만약 이런 생각이 허황된 것 같다면 우리는 패터슨 주위에서 자주 보이는 쌍둥이들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어야 한다. 생각해 보자. 한 도시 안에서 단시간에 그렇게 많은 쌍둥이들을 보는 게 가능한 일인지. 그럼에도 우리는 쌍둥이들에 대해 크게 의문을 품지 않는다. 로라가 월요일 아침 패터슨에게 쌍둥이에 관한 꿈 이야기를 했으니 패터슨의 주관적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거나, 다양한 인물상의 반영으로 보거나 일상의 한 패턴처럼 여긴다. 무언가가 잠재되어 있는 어떤 징후처럼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쌍둥이에 관한 꿈 이야기뿐만 아니라 영화 안의 모든 존재들은 충분히 비슷한 잠재력을 지니는 것이다.
4. 잠재력을 지닌 존재들을 구체적으로 보기 위해선 자무시의 전작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자무시의 초기작에선 동시간 각기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영화의 주요한 구조를 이루었다. <지상의 밤>은 그것이 곧 영화가 된 작품이고, <천국보다 낯선>(1984)은 마지막에 세 인물을 각기 다른 장소에 세워두며 이야기도 현재도 미래도 과감하게 열어젖혀 놓았다. <미스테리 트레인>(1989)은 동시간에 일어나는 개별 사건이 하나의 시간 축을 중심으로 원무하도록 만든 은근히 야심적인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후 자무시의 영화에 정확한 시간의 축과 공간의 경계가 눈에 띄게 사라진다. <고스트 독>(1999)의 사색적인 킬러 고스트 독(포레스트 휘태커)은 현대 도시에 살면서도 고대 사무라이의 규율을 따르고,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의 뱀파이어들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시간의 단위를 살아간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2009)에선 동일한 대사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인과율도 없이 인물들의 입에서 입으로 유랑하고 다닌다.
뿐만 아니라 ‘고독한 사나이’(이삭 드 번콜)가 미술관에서 그림 하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나면, 이후 그림과 비슷한 모습을 한 인물이나 사물이 그의 앞에 나타나는 등, 그림 속의 풍경이 하나의 현상으로 펼쳐진다. 또한 여러 장면을 몽환적으로 오버랩시키기도 한다. 그러니깐 자무시의 영화에 정확한 시간의 축과 공간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환각적이고 몽환적이고 최면적인 장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주인공의 정체성도 모호해진다. 엄밀히 따지면 초기작의 주인공들도 장소들 사이를 한껏 부유하며 미약하게 육체성을 유지하는 인물들이긴 했지만, 이후의 인물들은 차원이 다르다. 뱀파이어들은 차치하더라도 고스트 독과 고독한 사나이조차 유령도 아닌 사람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왜, 자무시의 영화는 더 이상 동시간의 단서도 필요하지 않고 경계들은 모호해진 것일까. 억지로 묶자면 세 영화 모두 장르의 환상성을 이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킬러와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작품들이니 포용의 범주가 넓어진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자무시의 관심사가 ‘동시간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이 어울려내는 동시적인 삶’에서 ‘불확정성 속에 놓인 모든 존재들이 이루어 내는 동시적인 삶’으로 옮겨갔기 때문인 것 같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의 “우리 각각은 옮겨가는 분자 덩이로 황홀경 속에 회전해요. 가까운 미래에 헌것은 새것이 되요. 각기 분자를 재구성해서”라는 대사의 내용처럼 자무시가 세상의 존재들을 불확정성 속에 놓인 분자 덩이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영화는 이제 분자의 자유로운 운동과 흐름을 현현해 내려는 실천적인 산물로도 보인다. 그의 영화에서 분자 덩이는 사물, 사람, 이야기, 역사 이 모든 것들이 될 수 있고 어떤 상황이나 어떤 형태로든 서로 작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존재가 된다.
그러니깐 패터슨시의 역사에서 극적이었던 사건은 영화의 우스꽝스럽고 극적인 바의 소동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쌍둥이들의 지속적인 출현은 토요일 로라와 패터슨이 관람하는 영화의 로라와 닮은 주인공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목요일 아침 패터슨의 버스 곁으로 보인 루 코스텔로의 공원 전경은 밤이 되면 루 코스텔로는 그의 이름으로 된 공원도 있으니 패터슨시의 최고 유명인이 되어야 한다는 덕의 주장으로도 순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패터슨>의 강자 마빈의 긴장된 시간이 처연한 시간으로 순환하지 않았는가. 불량해 보이는 청년들이 마빈이 비싼 종이니 조심하라고 말하는 화요일 밤의 팽팽한 긴장감은 다음 날 아침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토요일 찢어진 비밀 노트에 담겨 오고, 패터슨의 상실감으로 정체됐던 리듬은 “아하” 한 마디와 함께 다시 돌아온다.
패터슨이 여행하지 않음에도 유랑자의 리듬을 지니는 건 세상의 산책자로서의 그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를 둘러싼 이 분자 덩이들이 부정형의 리듬을 형성하며 하루하루의 흐름에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무시의 인물은 이제 매일같이 살아가는 장소에서도 유랑한다. 그러니 패터슨의 일주일은, 불확정성에 놓인 오늘을 살아가는 반응자의 유랑이 밤이 되면 아득해져 가고 아침이 되면 다시 깨어나는 쓸쓸하면서도 생기로운 삶이다. 고요함으로 몸의 리듬을 확인하는 삶, 조용히 세상을 응시하는 삶, 적극적으로 세상에 반응하는 삶, 사소한 존재들의 활기로 무거운 침묵이 깨어나는 삶, 장소들과 차원들 사이를 부유하는 삶, 분자 덩이들이 불확정성 속에서 여행하는 삶, 그러니깐 삶이라는 궁극의 미스터리. 짐 자무시는 이 삶이라는 미스터리 장르의 대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