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원 감독은 2007년 장편 데뷔작 <도살자>를 통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물론이고 제46회 뉴욕영화제, 제41회 시체스국제영화제 등 해외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개성 넘치는 공포영화로 주목받은 그가 10년 만에 또 한번 색다른 공포를 안긴다. 공포영화를 찍는 감독 지망생에게 벌어진 일을 다룬 영화 <암전>은 얼핏 김진원 감독의 자전적 체험이 반영된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공포의 ‘재미’를 살린 특색 있는 ‘장르영화’라는 목표를 놓치지 않는다.
-데뷔가 절박한 감독 지망생이 소재를 구하려고 소문 속의 공포영화를 찾아간다는 설정이다. 공포영화에 관한 공포영화라는 점이 독특하게 다가온다.
=소재를 찾다가 일본의 한 TV프로그램을 봤다. 어릴 때 재밌게 본 영화에 나온 곳을 찾아가는 컨셉이었는데 흥미로웠다. 저작권 문제로 마지막에 해당 영화의 영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점도 재미있었다. ‘영화를 찾아간다’는 방식에 끌려 거기에 살을 붙여나갔다.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닌데 그 과정에서 영화를 준비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
-공포영화지만 어떻게 보면 영화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극중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팩션인지 모르겠다”는 대사가 있는데 <암전>도 딱 그렇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전적 영화가 아니다. (웃음) 다만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결국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녹여내다 보니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됐다. 데뷔를 앞둔 감독을 주인공으로 설정하되 거리를 두기 위해 여성 감독 지망생으로 바꿔봤는데, 시선이 살짝 달라지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상당히 풍성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역할을 맡은 서예지 배우가 주는 독특한 느낌에 상당 부분 영감을 받아 다듬어지기도 했다. 장르적으로는 공포지만 테마는 광기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준비할 때 빠져드는 광기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 없진 않은데 그 부정적인 에너지와 고통을 공포로 풀어보면 색다를 것 같았다. 픽션과 팩션의 비율은 상상에 맡기겠다. (웃음)
-장편 데뷔작 <도살자> 이후 차기작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오래 걸린 건 나 자신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한국 영화계에서 장르영화 제작 편수가 적은 것도 아니고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면 공포영화에 지나친 설명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거다. 때론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더 무섭고 매력적인 경우도 있는데 워낙 장르영화의 무대가 좁다 보니 일단 시나리오에서 대부분 확실한 인과관계를 요구한다. 다행히 이번엔 미스터리에 대한 설명을 강요하지 않은 덕분에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웃음)
-영화의 주인공이 찾아가는 영화 속 공포영화의 제목이 <암전>인데 이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여러 의미에서 중의적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직전 불이 꺼진 순간 드는 묘한 기분이 있다. 이전부터 그 순간, 그 이미지들을 영화에 반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한편으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한 이야기니까 시작과 끝을 연결한다는 의미로 <암전>이란 제목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극장이란 공간이 주는 오싹함도 살리고 싶었다.
-몇몇 장면은 <엑소시스트>(1973), <링>(1999), <블레어 위치>(2016) 등 공포영화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 연상된다.
=다른 영화는 가능하면 참고하지 않으려고 했다. 오히려 호러 게임에서 영감을 받았다. 게임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쪽이 이미지를 연상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웃음) 예를 들면 <사일런트 힐>처럼 공간 자체가 주는 압박감과 터지기 직전의 긴장감을 살리고 싶었다.
-미정 역의 서예지 배우와 재현 역의 진선규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했나.
=서예지 배우는 <구해줘>라는 TV드라마에서 워낙 인상 깊게 봤다. 공포영화를 준비하는 감독이라면 저 배우랑 한번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 수밖에 없다. 운 좋게 이번에 함께하게 되었는데 기대 이상이라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서예지 배우를 믿고 캐릭터 색을 정해두기보다는 배우가 자유롭게 해석할 여지를 최대한 열어둘 수 있었다. 진선규 배우는 <범죄도시>(2017) 이후 인터뷰하는 걸 보고 함께하고 싶었다. 강렬한 악역을 맡은 사람이 저렇게 선할 수가 있나 싶어 그 온도 차에 반했다. 이번 영화에선 격한 대사와 상황을 표현할 때도 목소리에 진선규 배우 특유의 선함이 남아 있는 것 같아 특히 좋았다.
-현장 분위기가 무척 화기애애했다고 들었다.
=너무 좋았다. 그래서 공포영화답게 무서운 에피소드도 말하고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웃음) 워낙 강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장면이 많아서 그런 식의 완급 조절이 필요했다.
-극중 <암전>을 찍은 재현이란 인물이 자신이 공포영화를 찍은 이유가 <엑소시스트>를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감독님도 공포영화에 이끌린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설명한다면 <이블 데드>(1981)와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2003)이 아닐까? 나는 공포영화로 영화라는 세계에 입문한 터라 공포영화에 자연스럽게 이끌린다. 단단한 안전장치가 있는 덕분에 번지점프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가상의 세계에서 극한상황을 체험하고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을 즐긴다. 전작인 <도살자>는 고어의 색깔을 충실히 반영하고 싶어 만든 영화다. 다만 한번 해본 걸 또 하고 싶진 않다. 공포영화라는 장르 안에서 아직 보지 못한 것이 무얼까 고민하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나가고 싶다.
<암전>
감독 김진원 / 출연 서예지, 진선규 / 제작 토닉프로젝트, 아이뉴컴퍼니 / 배급 TCO(주)더콘텐츠온 / 개봉 2019년
● 시놉시스_ 감독 지망생 미정(서예지)은 시나리오 완성 압박에 시달린다. 미정은 ‘귀신이 찍었다’는 괴담이 나도는 무서운 영화 <암전>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영화를 찍은 감독 재현(진선규)을 찾아 나선다. 재현은 함부로 파헤치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지만 데뷔가 절박한 미정은 끈질긴 탐문 끝에 숨겨진 영화 <암전>의 영상 자료를 발견하고 끝내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얼마 뒤 미정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 즐길 수 있는 공포를 선사한다_ 호러는 색깔이 가장 확실한 장르다. 공포영화를 즐길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것이 공포‘영화’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진원 감독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즐기기 힘든 공포보다 판타지적 설정 아래 즐길 수 있는 공포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심리적 압박, 유령, 슬래셔, 서스펜스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