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19년 한국영화⑪] <버티고> 전계수 감독 - 뭉뚱그려져가는 감각의 결을 되살릴 수 있다면
2019-01-09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러브픽션>(2011)이 코믹 멜로였다면, 이번엔 정통 멜로다. 최근 찾아보기 힘든 멜로드라마로 전계수 감독의 신작 <버티고>는 반가운 도전이다. <삼거리극장>(2006)을 비롯한 전작과 톤이 사뭇 다르지만 감독이 20년 전부터 구상해온 궁극의 시나리오다. 42층 고층 건물 안을 부유하는 30대 초반 여성 서영(천우희)과 유리창 너머로 그녀의 상처를 지켜보는 로프공 관우(정재광)의 ‘아찔한’ 사랑 이야기. 30대 초반에 일어날 수 있는 각종 ‘현기증’(vertigo) 나는 어려움을 ‘버티고’, 상처를 치유해가는 한 여성의 변화를 지켜보는 성장 드라마로도 읽힌다.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인 전계수 감독을 만났다.

-현기증을 앓는 고층 건물 안의 여성, 불법 체류자인 로프공 남자의 사랑이야기다. 42층이 주는 불안함을 이들 사랑의 바탕으로 설정한 이유는 뭔가.

=20년 전 일본 요코하마에서 IT 회사를 다녔는데, 그때의 경험담이 영화의 바탕이다. 사무실이 70층이고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고층건물 안에서 본 유리(벽)가 나를 바깥의 실제 세계와 고립시키는 것 같더라. 영화 일을 시작하기 전이었는데, 영화는 하고 싶고 직장생활을 이대로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였다. 바깥은 매혹적이지만 나갈 방법은 찾을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 무작정 시나리오를 써보자 해서 주말마다 썼고, 그때 쓴 걸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

-어지럼증과 이명증을 앓고 있는 30대 초반 여성인 주인공 서영은 연애도, 일도 불안한 혼란의 시기를 겪는 중이다.

=고층으로 갈수록 감각이 소거된다. 풍경도 멀리 있고, 귀도 먹먹해진다. 시청각적 경험이 박제되고 진공 속에서 다른 공명을 일으키고, 감각도 그렇게 마르는 것 같았다. 서영은 비정규직의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고, 권위적인 한국 기업문화에 휘둘리고 희생당하기도 한다. 그런 구체적인 고용 문제는 서영을 보는 하나의 축이지만 그걸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현실 고발 영화는 아니다. 영화에 들어가기전 천우희씨한테 준 편지가 서영의 상태를 잘 설명하고 있다. 사랑엔 항상 실패하고, 고용은 불안정하고, 어른이 되어야 하는 강박은 있지만 방법은 모르겠고,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 못하는 성인. 야생을 혼자 버틸 자신도 없고 오기와 슬픔만 남은 상태. 아이도 성인도 아닌 그 상태를 서영이 겪는 나이, 서른 즈음의 상태라고 설명했다. 천우희씨도 지금 비슷한 나이이니 이런 감정들에 공감하길 바랐다.

-서영이 당시 고민에 빠져 있던 감독 본인을 투영한 캐릭터로 읽힌다. 서영의 일상을 흔드는 대조적인 매력의 두 남자가 등장하는데, 둘 다 실제 모델이 있을 것 같다.

=서영과 사내에서 비밀연애를 하는 능력 있는 남자 진수는 직장 다닐 때 부서의 상사를 모델로 삼았다. 일본 트렌디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유학파에 능력이 출중하고 잘생겨서 모든 여자 사원들의 아이돌이자 스캔들의 중심에 있었다. 자연스레 저 사람과 사귀는 사내 여성이 존재한다면 그 여성의 마음은 어떨까. 짜릿할까, 질투가 날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 와중에 서영의 마음을 흔드는 로프공 관우는 갑자기 그녀의 일상에 뛰어드는 남자여야 했다. 서영의 감각이 뭉뚱그려져가는 가운데 감각의 결을 되살리는 역할을 할, 그런 존재로 설정했다.

-<한공주>(2013), <곡성>(2016) 등으로 입증된 천우희의 안정적인 연기가 지지대라면, 진수 역의 유태오와 관우 역의 정재광은 새로운 등장, 새로운 기대지점이다.

=이번에 천우희씨 연기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 역시 여러 번 놀랐다. 서영과 비슷한 또래 여성이라 감정의 이해 폭이 넓더라. 메소드 타입의 연기는 아닌데 신만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왔다. 유태오씨는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들려줘서 캐릭터를 디테일하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정말 이 배우는 연구 대상인데, 쉬는 시간에도 하이데거 논문을 읽는다. 내가 철학전공인데 나보다 더하다. (웃음) 관우 역의 정재광씨는 이 영화로 스크린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는 배우다. 갑자기 서영의 세계로 불쑥 나타나는 역할이라 관객에게 알려지지 않은 얼굴을 찾고 싶었다. 오디션 없이, 단편 작업 등을 보고 캐스팅했는데, 관우의 이미지 그대로를 너무 잘 표현해줬다.

-최근 보기 힘든 정통 멜로드라마다. <삼거리극장>의 실험적인 시도나 <러브픽션>의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벗어난 시도다.

=7년 만의 신작이다. 그간 엎어진 영화도 많았다. <버티고>는 나 스스로 네트워크가 생기고 스스로도 펀딩이 가능한 정도가 됐을 때 찍어야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면에서 전작보다 아쉬움이 덜 남는, 스스로에게 ‘가장 수고한 작품’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효용이 없다고 느끼면서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상업적이지 않은 아이템을 생각 중인 이들에게 이 작품이 용기가 됐으면 좋겠다.

<버티고>

감독 전계수 / 출연 천우희, 유태오, 정재광 / 제작 영화사도로시, 로렐필름 / 배급 트리플픽쳐스 / 개봉 2019년 하반기

● 시놉시스_ 30대 초반 그래픽 디자이너 서영(천우희). 이명증과 어지럼증을 겪는 데다 비정규직, 가족과의 문제 등의 불안이 가세해 42층 고층 사무실 생활이 힘겹다. 사내에서 가장 인기 많은 진수(유태오)와 짜릿한 비밀연애를 즐기고 있지만 이 관계 역시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서영의 시야에 계속 걸리는 남자. 도시의 빌딩 숲을 스파이더맨처럼 외줄에 의지한 채 유영하는 로프공 관우(정재광)가 그녀의 지친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 비주얼로 보는 그녀의 심리_ “<러스트 앤 본>(2012)의 자연광이 낮의 이미지라면, 밤은 <화양연화>(2000)의 단단함 어둠이었다.” 낮과 밤의 서로 다른 질감을 통해, 서영이 느끼는 심리적 패닉과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버티고>의 촬영 컨셉. <캐롤>(2015)이나 <그녀>(2013)도 레퍼런스로 삼은 이미지다. 특히 이명증을 앓고 있는 서영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마치 진공 상태에 들어가 있다가 감각이 깨어나는 듯한 상태를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거울에 비친 리플렉션의 이미지의 활용, 와이어 촬영 등 감정을 잡아내기 위해 풀어야 할 ‘체력적’인 수고와 ‘기술적’인 숙제로 가득한 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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