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이라는 이름 뒤에 붙은 ‘쇼박스 투자제작본부장’이라는 직책이 아무래도 낯설고 어색하다. 이상윤 투자제작본부장은 CJ엔터테인먼트와 CGV아트하우스 등에서 20여년 동안 지내온 CJ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해 7월 쇼박스로 옮겼다. ‘CJ맨’이던 그가 쇼박스로 간다는 소식이 충무로에 전해졌을 때 많은 영화인들이 깜짝 놀란 것도 그래서다. 쇼박스에서 6개월째 일하고 있는 이 본부장은 “집중력이 높은 조직이다. 라인업 한편 한편을 성공시키기 위해 전사적인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며 쇼박스를 소개했다.
-지난해 쇼박스는 <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 <곤지암> <암수살인> <성난황소> <마약왕>을 차례로 선보였다. 지난해 라인업을 운용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지난해는 예산이 많이 투입된 영화들이 대체로 고전한 반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 공포영화 <곤지암>이나 쇼박스 영화는 아니지만 <완벽한 타인>처럼 새로운 기획으로 제작된 저예산영화들이 선전했다. 또, <서치>나 <보헤미안 랩소디> 같은 할리우드영화의 흥행을 지켜보면서 ‘요즘 관객은 어떤 영화를 스크린에서 보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보헤미안 랩소디>와 <완벽한 타인>의 흥행은 추석 이후 늦가을 비수기에 거둔 성적이라 흥미롭게 지켜봤을 것 같다.
=관객은 재미있는 영화라면 언제라도 본다는 명제를 입증한 사례다. 관객이 영화를 선택할 때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는 가성비다. 가격에 대비하는 건 티켓값이 아닌 시간이라고 본다. 여유 있는 날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이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은 영화를 보면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현재 영화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TV드라마다. 큰돈 들이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만족감을 느끼며 시간을 즐길 수 있으니까. 드라마의 완성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는 드라마를 능가하는 가치를 만들어내야 해서 부담감이 커진 상황이라 하겠다.
-올해 쇼박스는 <뺑반> <미성년> <돈> <전투> <남산의 부장들> <패키지> <퍼펙트맨> 등 7편으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시즌마다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할 수 있는 대형 작품들을 꾸렸다. 다양한 장르를 알차게 준비했고, 저마다 승부수를 갖춘 영화들이라 균형감이 좋은 라인업이라고 자부한다.
-<이태원 클라쓰>와 <대세녀의 메이크업 이야기> 등 드라마 두편을 제작하기로 한 건 흥미롭다. 영화사업만 하다가 드라마 제작에 뛰어든 배경은 무엇인가.
=영화와 드라마, 극장과 TV라는 경계가 무너지고, 콘텐츠의 융복합 움직임이 일어나는 최근의 산업 동향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전략이자 선택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 그리고 네트워크를 활용해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를 넘어서는 작품을 적극적으로 만들려고 한다.
-최근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메리크리스마스, 스튜디오 썸머 등 신생 투자·배급사들이 대거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는데 이 움직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한국영화 시장이 신규 자본에 그다지 매력적인 시장은 아니다. 최근의 신규 자본 가세가 이상한 현상처럼 보이는 것도 그래서다. 기존 시장에서 만들어지기 어려웠던 영화들이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은 기대감을 갖게 되는 한편 긍정적인 지점이다. 영향력 있는 투자·배급사로서 쇼박스 또한 작품의 본질에 좀더 충실해야 하고, 깊은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좋은 IP를 최대한 많이 확보해 기획 초기 단계부터 치고 나가야 하고, 작가, 프로듀서 등 창작자들에게 협업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최근 조직 개편에서 기획제작팀을 만든 것도 좋은 IP를 확보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인가.
=그렇다. 기획제작팀이 좋은 IP, 시나리오를 집중적으로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작자, 프로듀서, 감독 등 새로운 파트너들의 풀을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드라마 두편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쇼박스의 <마약왕>을 포함해 <스윙키즈> <PMC: 더 벙커> 등 한국영화의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영화계가 만들려는 영화의 방향과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가 빗나가는 것 같다. 관객이 원하는 니즈는 다양하고 빠르게 변하고 있는 반면, 영화인들은 그 속도를 잘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극장을 찾은 관객의 숫자는 예년과 큰 변동이 없었지만 다양한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관람하던 예년과 달리 이제는 관객이 특정 영화에만 몰리고 그외 영화들을 외면하는 현상이 점점 굳어지는 것 같다.
-쇼박스 또한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개별 프로젝트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그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관객이 좋아할 만한 아이템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고 예측하기 쉽지 않아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가 성장하면서 관객 또한 영화에 대한 경험치가 많이 쌓였고, 가치 있는 영화를 고르기 위한 기준이 굉장히 높아진 상황이라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더 도전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괴> <명당> <안시성> <협상> 등 한국영화 4편이 개봉해 누구도 웃지 못한 지난해 추석 시장도 단순한 공급 과잉에서 빚어진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로 들린다.
=공급 과잉은 이 문제와 거의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추석 시장은 관객이 여름, 추석, 크리스마스, 설 등 한국영화 4대 시장에서 개봉한 영화를 반드시 봐줄 것이라는 개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을 한국영화의 위기의 전조나 현상으로 보면 곤란하다. 관객의 영화 관람 변화가 이미 오랫동안 축적돼 나타난 결과로 봐야 하고, 생각보다 엄중할 수밖에 없는 건 위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위기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네이버웹툰, 카카오 등 공룡 ICT 기업들이 스튜디오N, 세미콜론 스튜디오(이상 네이버웹툰), 카카오M(카카오) 등 자회사를 설립해 영화나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었는데 기존 사업자로서 이 움직임을 어떻게 보나.
=플랫폼이나 디바이스의 변화에 따라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어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궁금하고, 그러한 회사들이 산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만드는 사람도, 자본도 숫자가 적으면 시장이 빨리 도태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당장은 그들이 의미 있는 성과를 내놓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쇼박스의 경쟁사들인데.
=한국영화 시장이 산업으로 성장한 이후 지금까지의 역사를 쭉 살펴보면 한 회사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결국은 각 회사가 팀 경쟁력을 가지고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싸움이라고 보았을 때 쇼박스는 우리만의 팀 경쟁력과 원칙에 충실하면 경쟁 구도가 이루어지기 전에 얼마든지 좋은 선례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주 52시간 근무제, 최저임금제가 시행되면서 순제작비가 지난해에 비해 50% 이상 상승했다는 얘기가 충무로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손익분기점을 넘기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상황인 건 분명하다.
=스탭 근로 환경과 처우 조건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나를 포함한 영화계 플레이어 모두가 동의한다. 다만, 순제작비가 갈수록 상승하고 있는 현상은 매우 심각한 문제고, 투자·배급사로서 비용 상승에 대한 우려를 막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다.
-2020년 라인업을 확보하는 올해가 본격적인 시험대가 될 듯한데.
=책임감이 막중하지만 당장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가 중요하지는 않다. 콘텐츠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무언가를 서둘러 보여주려고 하다가 악수를 둔 나머지 성급한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올해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다. 관객이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나씩 내놓으면서 성실하게 일하면 좋은 성과가 나지 않을까 싶다.
● 타사 라인업 중 가장 기대작은?_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배급 CJ엔터테인먼트)이다. 관객이 재미있어하는 이야기와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방향이 맞물리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나 더 꼽는다면 이수진 감독의 <우상>(배급 CGV아트하우스)이다. 이 영화 또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