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워너브러더스코리아는 마동석 주연의 <챔피언>, 신인배우 김다미를 주연으로 발탁한 <마녀>, 그리고 김지운 감독이 연출하고 강동원, 한효주, 정우성이 주연한 <인랑> 등 3편을 선보였다. 이중 흥행에 성공한 것은 <마녀>였고 기대작 <인랑>은 참패했다. 최재원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로컬 프로덕션 대표는 <인랑>의 실패와 지난해 한국영화 전반의 부진을 곱씹으며, 충격적 결과의 반추가 자성과 각성, 새로운 방안 모색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심했다”, “안일했다”, “오만했다”는 표현은 모두 자성의 정도를 말해주는 서술어였다. 관객의 변화 및 경쟁자가 늘어난 시장 상황의 변화,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의 향후 계획까지 최재원 대표에게 들었다.
-2018년에 <챔피언> <마녀> <인랑>을 선보였다. <마녀>를 제외하고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한해였다.
=우선 출연배우의 미투 문제로 개봉하지 못한 영화(<이웃사촌>)가 있고, <악질경찰>도 개봉을 미루면서 지난해엔 3편의 영화만 선보였다. 결과적으로 <악질경찰> <나를 찾아줘> <광대들: 풍문 조작단> <장사리 9.15> 등 2019년의 라인업이 풍성해졌다. 지난해의 경우, <챔피언>이 손해를 보지 않았고 <마녀>가 성공을 거두면서 솔직히 <인랑>이 손익분기점에 근접하기만 해도 선방한 한해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랑>이 참패했다. 역사가 오래된 스튜디오여서인지 영화 한편의 성적에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지만 한국영화팀은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인랑>으로 인한 타격이 꽤 컸을 것 같은데.
=걱정해주신 분들이 많은데 다행히 잘리진 않았다. (웃음) 향후가 중요하다. 지난해 전반적으로 한국영화계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인랑>의 결과를 워너만이 고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계를 원팀으로 봤을 때 <인랑>은 일종의 선발투수가 마운드에 나선 셈이었다. 김지운 감독이 연출하고 강동원, 한효주, 정우성이라는 에이스가 출격한, 쓸 수 있는 최고의 카드를 쓴 영화가 관객에게 외면받았다. 이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우리 회사 영화가 망한 게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쉽게 봐선 안 되는 문제라는 거다. <인랑>에 이어 추석 시즌과 겨울 시즌의 한국영화도 외면받았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고민해야 한다.
-얘기한 것처럼, 2018년 하반기 한국영화의 성적표는 확실히 한국영화 위기설에 불을 지폈다.
=최근의 결과를 엄중히 받아들이고 위기를 체감해야 한다. 지난해 외화들은 대체로 잘됐다. ‘이건 뭐지? 왜 할리우드영화에는 관대하고 한국영화에는 그렇지 못하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영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일종의 트집 잡기 형태로 비쳐질 땐 우려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확실히 관객이 ‘한국영화에 식상했구나’라고 느낀다. 20년 가까이 이어져온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사랑이 식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영화계 내부에 있었다고 본다. 관객의 영화 관람 행태와 관점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데 소홀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한국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안일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옳았다고 주장하는 건 오만 아닌가 싶다.
-확실히 관객이 변하고 있다. 영화 관람 패턴의 변화, 관객의 수준과 취향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어떻게 이 변화에 대처하려 하나.
=더이상 영화는 사람들에게 ‘시리어스’한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 영화 볼래?’가 아니라 ‘우리 영화나 볼래?’가 돼버렸다. 극장에서 영화보는 것을 이벤트로 소비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할리우드 빅 프로젝트는 최소한의 재미는 담보한다’는 생각으로 대작을 고르는 것 같다. 사실 <어벤져스> 시리즈의 경우 캐릭터에 대한 로열티가 큰 작품이다. 그 로열티가 스토리텔링을 압도하는 느낌이고, 젊은 관객은 바로 그 캐릭터에 열광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면서도 요즘 관객은 캐릭터를 소비한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한국영화가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상황도 누적됐다. 빨리 답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어벤져스>는 좋아하는데 왜 한국영화는 안 보지? 그런데 왜 <독전>과 <마녀>는 잘됐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해야 한다. 지난해 한국영화를 보면 기대작들은 안 되고 기대하지 않은 작품들은 잘됐다. 관객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점점 책(시나리오)을 고르는 게 어렵다. 자기 확신을 갖기가 어렵다. 올해 화두로 삼은 것 중 하나가 불가 용어인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직역하면 ‘텅 비었지만 묘하게 있다’는 뜻인데 그건 곧 자유자재한 상태다. 그걸 영화 만들기에 적용해 기존에 알고 있던 걸 모두 버린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려 한다. 이전에 결정했던 작품들도 다시 의심하고 있다. 이게 맞아? 옳고 재밌어? 계속 의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신생 투자·배급사들의 설립으로 인해 한국영화의 투자·배급 환경에도 변화가 생길 텐데, 이는 어떻게 지켜보고 있나.
=우선 신생 투자·배급사들이 생겨난 건 인적 분화의 과정이었다고 본다. 메이저 배급사에 있던 이들이 나와서 또 다른 회사를 차린 거고,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영화계가 확장일로의 성장기였다면 반가운 소식일 텐데 침체기와 위기설이 도래하는 시점이라 어젠다가 되는 것 같다. 업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어떤 식으로 경쟁하게 될지는 올해 각 회사의 결과를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경쟁 구도 속에서 워너만의 차별화라면 신인감독을 비롯한 창작자에 대한 리스펙트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시나리오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같이 고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연장선에서 올해 준비하는 것이 워너브러더스의 영화들을 한국에서 리메이크하는 작업이다. 워너브러더스의 영화인 <인턴>(2015), <네고시에이터>(1998), 그리고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의 리메이크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올해 그리고 내년에 워너에선 어떤 시도들을 하려 하나.
=좀더 과감한 시도, 일종의 지평을 넓히는 시도를 해보고 싶다. 우리가 시장 사이즈를 키울 순 없지만 새로운 캐스팅, 새로운 소재 발굴 등 관행을 깨는 새로운 시도는 할 수 있으니까. 그 점에서 워너는 꾸준히 1년에 한편씩은 신인감독의 새로운 시도를 지지한다든지, 신인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한다든지, 다른 시도들을 해왔던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국영화계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올해는 어렵지만 재밌는 한해가 될 것 같다.
● 타사 라인업 중 가장 기대작은?_ “<나랏말싸미>(배급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와 <기생충>(배급 CJ엔터테인먼트). 배우 송강호와 친분이 두텁기도 해서 두 영화의 현장에도 모두 다녀왔다. 우선 <나랏말싸미>는 소재에 대한 관심도 크고, 조철현 감독의 뚝심이 너무 좋았다. 환갑에 입봉하는 감독이 정말 멋있고 그 노련함이 대단하다. 최근에 본 시나리오 중 <나랏말싸미>가 최고였다. <기생충> 현장에선 역시나 봉준호 감독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기운과 유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