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서 상영된 김초희 감독의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KBS독립영화상, CGV아트하우스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을 수상하며 3관왕 자리에 올랐다. 이 영화의 상복은, 가만히 보고 있자면 사랑에 빠지지 않기가 힘든, 주인공 찬실(강말금)의 맑고 굳센 기운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즈 야스지로를 너무나 흠모하기에 관심가는 남자가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고 하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못말리는 시네필 찬실. 유능한 영화 프로듀서였던 그녀는 늘 작품을 함께한 작가주의 감독이 술자리에서 돌연사하자 “묵고 살아야 되는데 진짜로 아무도 안 찾는” 막막한 상태에 접어든다. 영화는 찬실이 추운 겨울날 외딴 마을에 셋방을 얻어 살면서 집주인 할머니(윤여정)와 정을 쌓고, 친한 배우 소피(윤승아)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어느새 소피의 불어 선생님 영(배유람)에게 로맨스를 꿈꾸는 과정을 따라간다.
밝고 씩씩한 캐릭터의 미덕은 김초희 감독의 전작인 단편영화 <산나물 처녀>(2016)에서도 진즉 모습을 드러냈다. 먼 행성에서 짝을 찾아 지구로 날아든 70대 순심(윤여정)과 숲속에서 혼자 나물을 캐는 달래(정유미)의 독특한 우정을 그린 영화다. 이들 캐릭터처럼 기자가 만난 감독의 모습도 비슷했다. 부산 출신인 김초희 감독은 찬실과 똑 닮은 말투로 10대 시절부터 시작된 영화를 향한 사랑을 고백했다. 학창 시절엔 홍콩영화 속에서 행복을 즐겼고, 프랑스로 영화 유학을 가기 위해 20살부터 6년간 비디오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시절에는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집시의 시간>(1989)을 마음에 새겼다. 막상 프랑스에 도착했을 땐 파리 사람들의 까칠한 분위기에 “아, 잘못 왔다” 싶었지만, 공항에서 열렬히 배웅해준 친구들의 얼굴이 밟혀 돌아갈 수가 없었다고.
2008년부터 2015년까지 홍상수 감독의 프로듀서로 일해온 김초희 감독은 이후 한동안 작품 활동의 예기치 않은 슬럼프를 겪어야 했다. “영화를 아예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니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마음속에 꺼져가는 영화의 불씨를 지피려고 무작정 시나리오를 썼다.” 그렇게 ‘기다리는 마음’, ‘눈물이 방울방울’, ‘눈물이 안 나와’ 등의 제목을 거치며 탄생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우습고 슬프고 때로는 경건하게 자세를 고쳐잡으며 한 사람의 인생에 찾아온 절망과 희망을 바라본다. 영화를 사랑한 첫 마음을 되짚기 위해 장국영의 유령을 호출하고, 한창 힘든 시기에 감독의 아버지가 부산에서 특송우편으로 편지를 부쳐온 경험을 되살려 아버지에게 편지 내레이션을 부탁한 일화 같은 것들이 인터뷰 도중 무수히 쏟아져나왔다. 이를 종합하면, 현실과 영화를 아우르며 느슨하지만 따뜻하게 서로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의 연결이 최종 제목을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결정하게 된 이유인 듯싶다. “작품 제작에 많은 격려를 실어준 윤여정 배우를 비롯해 삶에서 감사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찬실은 나로부터 출발한 캐릭터. 그래서 인물을 객관화하기가 더 용이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경쾌한 터치로 슬픔을 중화하고 적당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태도가 뛰어난 영화다. “유머가 슬픔이나 힘듦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소중한 덕목이라 생각한다. 일상을 살아갈 때 코미디가 도움이 된다.” 이 균형 감각 속에서 단연 놀라운 얼굴이 있다면 바로 찬실 역의 강말금 배우다. 어쩐지 그녀만 등장하면 스크린이 환하고 또 뭉클해진다. 김초희 감독은 배우 강말금을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단편영화 <자유연기>(감독 김도영, 2018)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 영화에서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저 사람 속에는 뭔가 진짜가 들어 있구나, 라고 느꼈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진짜’가 있었다.” 대학로에서 이루어진 첫 만남에서 강말금 배우는 29살까지 부산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연기를 하겠다고 혼자 서울에 올라온 이력을 감독에게 들려줬다. “오디션도 리딩도 안 했다. 혹시 시켜봤다가 마음에 안 들면 그 사람을 안 쓸까봐. 저 사람은 찬실이가 될 운명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연기를 위해 오랜 시간 홀로 싸우고 매진한 스토리가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딱 하나만 물어봤다. 사투리를 쓰면서 밝은 연기를 해야 하는데 평소 성격이 어떠냐고. 본인은 내성적이라고 하더라. 배우가 실제로 내성적이라고 해도 외향적인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니지 않냐, 물어보니 그녀가 즉각 동의했다. 우리 둘 사이에 어떤 단합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열성으로 서로를 알아본 감독과 배우의 협력은 결국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빛나는 페이소스의 순간들을 새겨넣었다. 곧잘 누추하고 쓸쓸한 현실도 매 순간 영화적으로 바라보는 어떤 이의 삶. 판타지적 장치와 오마주를 동원해 찬실의 일상에서 코미디와 멜랑콜리가 반짝이도록 만든 김초희 감독의 데뷔작은, 감독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마음의 품을 넓혀 관객까지 제대로 끌어안은 사례가 될 것이다. “앞으로도 영화에 관한 내 순정을 잃고 싶지 않다. 혹시 내가 영화를 잘 못 만들고, 대신 정말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님이 나타나면 언제든 그 영화에 숟가락을 보태려고 노력할 것 같다. 그 마음이 다시 생긴 것 자체가 내게는 놀랍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어떤 영화?
“시집은 못 가도 평생 영화는 찍고 살 줄 알았던” 영화 프로듀서 찬실(강말금)은 늘 작업을 함께해온 감독이 돌연사하는 바람에 직업을 잃고 만다. 외딴 산골 마을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한 그녀는 당장 생활비가 궁한 까닭에 친한 배우 소피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 영화에만 목숨 걸었던 자신의 삶을 반추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나타난 소피의 불어선생님 영에게 마음이 설렐 무렵, 홍콩 배우 장국영의 유령까지 나타나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집시의 시간> 등 그 시절 찬실을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추억들이 호출되며 가슴 깊이 쓸쓸하고도 코믹한 삶의 갱생기가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