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살의 여성 노인이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벌어지는 이야기. 부산영화제 홈페이지에 공개된 <69세>의 줄거리는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소재 자체의 수위도 높거니와 자칫하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려 하는 것보다 이슈의 선정성이 더 부각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에 연출의 묘가 요구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첫 장편영화 연출작으로 <69세>를 선택한 임선애 감독은 피해자의 고통을 노골적으로 전시하거나 소재의 선정성에 오롯이 기대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이 작품은 품위 있게 살아가고자 했으나 자꾸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는 한 여성 노인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배우 예수정이 연기하는 69살의 여성 효정은 한국 사회의 사각지대로 밀려난 노인, 특히 노년 여성의 애환을 대변하는 캐릭터인 동시에 끝끝내 용기를 내어 세상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전하는 존엄한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다고 느꼈던 장년층 캐릭터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이 인상적인 <69세>는 올해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상영작으로, 영화를 연출한 임선애 감독은 KNN문화재단이 뉴커런츠 상영작 중 관객으로부터 가장 많은 호평을 받은 작품에 수여하는 KNN관객상을 수상했다. 그는 “사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나는 이제 영화감독이 될 수 없겠다고 스스로 알아서 선을 그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살다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혼자가 될 수 있는 5~6시간을 활용해 쓴 작품이 <69세>”였다며 “다른 여성들에게 결혼하고 아이가 있어도 여자가 영화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도 영화계에서 끝까지 버틸 생각이다. (웃음)”라는 소감을 전했다. <69세>는 임선애 감독이 우연히 본 여성 노인 대상의 성범죄에 관한 칼럼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여성 노인을 무성적 존재로 보는 사회적 편견이, 외려 가해자들이 여성 노인을 타깃으로 삼는 이유가 된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으로 향하던 임선애 감독은 집 현관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를 보고 불현듯 공포심을 느꼈다. “혹시 내가 지나가는데 저사람이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지 않을까, 성추행을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여성으로서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노년의 여성이라고 다를까 싶더라.” 임선애 감독은 그동안 성폭력을 다룬 한국영화는 많았지만 노인 성폭력 문제는 거의 다뤄진 적이 없었고, 그러한 지점을 창작자로서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 <69세>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한다. 이 영화를 통해 노인 성폭력 문제가 가시화된다면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시작하고 가해자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임선애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어떤 사안에 익숙해져야 비로소 그 사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69세>가 성폭력 문제에 대한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임선애 감독에 따르면 <69세>는 주연배우 예수정을 만나기 전과 후로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다. “가해자가 법적 처벌을 받아도 피해자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던 그는 예수정과의 만남을 통해 “노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시선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첫 만남에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69년을 살아온 여성이 젊은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했을 때 나라면 여성으로서 수치심이 들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했을 것 같다’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효정을 무시할 수 있었던 거라고 선생님은 생각하시더라. 극중에 ‘이 나라에 분리수거할 대상이 어디 쓰레기뿐이냐’는 대사가 나온다. 성폭력이라는 소재로 이야기의 문을 열었지만 결국 이 영화가 노인 문제에 대한 확장된 시선의 영화가 되길 바랐다.” 주인공 효정의 나이가 ‘69살’인 건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위치한 여성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예수정이 연기하는 효정은 누구라도 호감을 가질 만큼 품위 있고 차림이 말끔한 노인이다. 동시에 그는 시인 동인(기주봉)과 함께 살면서도 전형적인 부부로서가 아닌, 동반자로서 함께하는 인물이다. 각자가 고수해온 삶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서로의 존엄을 지키는 한편 그들을 소외시키는 세상에 각자의 방식으로 고발문을 띄우는 두 노인의 모습은, 임선애 감독의 표현대로 “아름답다”. 모두가 긍정하고 응원할 수 있는 노년 캐릭터의 좋은 예라 할 만하다.
임선애 감독은 홍익대 광고멀티미디어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서 극영화 시나리오를 전공했다. 대학 시절 우연히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며 스토리보드 작업을 한 뒤, 영상 콘텐츠의 매력에 빠진 그는 <씨네21>을 구독하며 영화 정보를 얻고, 잡지에서 소개하는 단편영화 워크숍에 참여하며 영화인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오버 더 레인보우>(2002)의 스크립터로 활동하게 된 그는 미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처음 현장에서 스토리보드를 그린 뒤, <왕의 남자>(2005), <여자, 정혜>(2005), <도가니>(2011) 등의 상업영화 스토리보드 작가로 활동하며 많은 감독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어떤 감독님이 그러시더라. 작가님 돈 벌면서 연출 공부 하시는 거라고. 그래서 ‘네, 맞아요’ 했다.” 그는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며 시나리오에 대한 감각을 익혔고, 이윤기 감독의 <러브토크>(2005) 각색, 유지태 감독의 연출작 <마이 라띠마>(2012)의 각본 작업을 거쳐 첫 장편영화 <69세>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일상으로부터 특별한 드라마를 이끌어내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는 감독의 발견이 반갑다.
<69세>는 어떤 영화?
69살의 효정(예수정)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이후 효정은 계속해서 그날의 잔상에 시달리며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 참다못한 그는 결국 함께 사는 동인(기주봉)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하지만 경찰은 정말 젊은 남자가 그랬겠냐며 효정의 증언에 의구심을 품는다. 더욱이 간호조무사는 자신과 효정이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한다. 법원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나이 차이를 근거로 해당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한다. 이내 효정 편을 들던 동인까지도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