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미투 시대 영화 계보학 ②] 로만 폴란스키 영화를 포기해야 한다. 박우성 평론가가 말한다
2020-03-23
글 : 박우성 (영화평론가)
창작자의 윤리를 말하다, ‘로만 폴란스키가 쏘아올린 작은 공’. 세자르영화제가 로만 폴란스키에 감독상 주며 촉발된 논란 ‘예술과 창작자를 분리할 것인가’
지난 2월28일 제45회 세자르영화제에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신작 <언 오피서 앤드 어 스파이>(J’accuse)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와 동시에 예술과 창작자의 윤리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로만 폴란스키는 1977년 미국에서 아동 강간 혐의에 대한 범죄를 인정한 이후 무려 40여년간 유럽에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 와중에도 로만 폴란스키는 꾸준히 영화를 찍었는데 이번에 프랑스 영화계가 그의 손을 잡아주며 문제를 촉발시킨 것이다. 프랑스 문화계는 작품은 그저 작품으로만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안팎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저항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만도 없다. 이건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과 창작자를 분리할 것인가’에 관한 고답적인 질문이 되어서도 안된다. 로만 폴란스키와 세자르의 선택이라는 명백한 상황을 목격한 이상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드러내야만 한다. <씨네21>에서는 듀나와 박우성 영화평론가에게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이 두편의 서로 다른, 날카롭고 단단한 의견이 당신의 판단을 돕는 지팡이가 되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피아니스트>

카메라를 경유해 우리의 눈앞에 문제의 세자르영화제 시상식 실황이 펼쳐진다. 이때 우리는 기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선과 마주한다. 로만 폴란스키 관련 시상 순서가 임박했을 즈음, 무대 위를 멀리서 포착하던 카메라가 시선을 급히 옮겨 객석의 돌발적인 움직임으로 밀착했던 것이다. 그곳에 심사자의 선택에 대립하는 여성 영화인의 제스처가 있다. 어처구니없는 선택에 대한 상식적 저항으로서의 퇴장. 그런데 우리가 본 것은 단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거기에 있던 것은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해 충분히 예상했다는 식의 전환, 혹은 돌발 상황의 액면가 그대로였다면 불가능했을 컷의 유연한 분할과 접합, 그러니까 갈등의 미분화된 정념마저 매끈한 대결 구도로 환원하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카메라 욕망이 아닌가. 이 기이한 전시에서 정작 우리는 ‘진짜’ 피해자를 위한 자리를 상정할 수 없다.

작품의 명예와 작가의 명성은 둘이자 하나

<피아니스트>

로만 폴란스키가 나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갈 역량이 나에게는 없다. 그로 말하자면 악행을 문자화하는 것조차 비도덕적으로 보일 만큼 나쁜 인간이다. 이러한 명쾌한 판명으로 사태가 종료된다면 다행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상황의 실타래는 생각보다 복잡해 보인다. 그의 신작에 감독상을 시상한 이번 선택은 예술사의 아주 오래된 딜레마의 중첩이기도 하다. 로만 폴란스키는 제법, 아니 대단히 성공한 영화감독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작가와 작품은 포개지는가 분리되는가. 비윤리적 작가가 만든 작품의 윤리적 지위는 어떻게 되며, 작품이 비윤리적일 때 작가 역시 곧장 비윤리적 인간이 되는가. 그러니까 그가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과 그의 작품이 미적으로 우수하다는 사실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인가 아니면 각각 따로 둘인가.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현명한 답은 당장의 선택을 유보하는 것, 즉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을 피하는 것이다. 문화현상을 읽을 때 해석자로서 우리는 의미의 비결정성에 대한 숙고와 함께 의심을 동반해야 한다는 지침 정도는 알고 있다. ‘상황’과 ‘맥락’과 ‘특수’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는 유연한 선택의 가능성은 의미의 단언, 과신, 맹목을 피하는 유효한 방법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오직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경우 우리는 자기 확증으로의 귀속을 피하기 힘들다. 문제는 이로써 다음과 같은 의아한 진술이 성립된다는 사실이다. 로만 폴란스키라는 개인은 나쁘지만 ‘상황’에 따라 그의 영화는 훌륭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영화와 개인을 곧장 대응시키는 방식은 ‘맥락’에 따라 오류를 동반할 가능성이 높다. 그가 나쁘다고 해서 그의 영화마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미학이라는 ‘특수’를 무시한 검열 행위에 가깝다. 바로 이것이 로만 폴란스키에게 감독상을 수여한 2020년 세자르영화제의 논리이며, 최우수감독상을 안긴 2010년 베를린국제영화제의 합리화이자, 감독상을 쥐어준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전제이고, 황금종려상을 선물한 2002년 칸국제영화제의 원칙이며…,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영화 창작의 기회를 그에게 제공하는 자본의 변명인 것이다.

이처럼 의심을 멈추는 순간 둘 다를 지향하는 열린 태도는 자칫 둘 중 하나만의 선택으로 닫혀버릴 가능성이 높다. 유연한 해석을 말하는 진단들이 실제로 실행하는 바는 그가 만든 영화의 명예를 적극 떠받치는 작업이다. 상황, 맥락, 특수 등에 따른 접근이 결과적으로 작가와 작품의 강력한 구분을 지시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예술은 예술이고 정치는 정치라는 오래된 이분법의 반복에 가깝다. 물론 이를 완전히 틀렸다 말할 수는 없다. 작품을 정확히 응시하기 위해 작가를 괄호 안에 넣는 시차적 관점은 해석의 생산적인 전통 중 하나다. 하지만 괄호 묶기는 어찌되었든 분석의 효율성을 위한 가상적 토대에 불과하며 언제든 풀리기 마련이고 어떤 경우 마땅히 풀려야만 한다. 그의 작품을 인정하는 판단들은 스스로의 발화가 곧장 그에 대한 평가로까지 이어지는 자동적 수행을 방어할 수 없다. 그에게 수여되는 감독상이 ‘나쁜 인간’이 아니라 ‘영화 예술가’만을 위한 것이라는 확고한 구분선 역시 성립되기 힘들다. 작품의 명예와 작가의 명성은 따로 둘이면서 동시에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내재적 가치, 말하자면 그 자체의 지위로서 영화미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란 타동사적이다. 이 말의 뜻은 작품의 객관적 가치가 바깥의 특정한 틀거리나 주관성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될 수 없다는 의미다. 오로지 미적 기준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무엇인지와 관련해 감쪽같이 모르는 척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생산한 영화의 지위만큼은 보듬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그의 범죄를 애초에 없던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는 환상에 가깝다. 우리는 그가 범죄자가 아니었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다른 무엇도 아닌 아동 성폭행 범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이다. 이 사실 앞에서 새하얀 도화지와 같은 순진무구한 텍스트 해석은 얼마나 한가한가. 우리의 관람 행위 안에서 그의 작품은 만듦새의 가치가 어떠하든 그가 행한 범죄의 심각성에 의해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영화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으며, 이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미학이라는 투명한 창을 악랄하게 걷어찬 장본인은 로만 폴란스키 자신이다.

폴란스키의 영화를 포기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나는 우리가 그의 영화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역사에 그것의 지분이 있다지만 그걸 뺀다고 역사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며 설사 허물어지더라도 지우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다. 세계의 윤리 공동체가 무너진다면 영화의 윤리 공동체도 무너진다. 세계가 영화보다 먼저다. 이것은 윤리 파수꾼의 지위에 도취된 자기 확증의 결론이 아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덧없으며 수사적 차원에 머문다. 그의 영화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여전히 영감을 실어나르는 중이며 앞으로도 여기저기서 상영될 것이다. 하지만 무기력한 우리는 최소한 이미 봐버린 것들에 대해 굳이 발화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할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해 철저히 무지한 침묵의 연기자로 스스로를 적극 구성할 수도 있다. 미학적 가치에 대한 전망은 그가 존재했던 영화사의 과거가 아니라 그를 과감하게 지우는 현재로부터 자양분을 얻는 가능성으로서의 영화사여야 한다. 우리는 로만 폴란스키라는 텍스트의 공론화를 전적으로 포기할 필요가 있다.

논란이 필요 없는 사안에 대한 논란은 때로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 같다. 그것은 논란이라는 흥미로운 구경거리 자체다. 엔터테인먼트 물질로 전시되는 매끈한 대결 구도는 나쁜 인간 로만 폴란스키를 현재화한다는 점에서 심히 유감스럽다. 범죄 이후에도 잊을 만하면 여성혐오 발언을 일삼던 그는 이번 시상식에 불참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여성운동가들의 공개적인 린치가 두렵다. 가족과 나를 지키기 위해 불참한다.” 가해와 피해의 폭력적 물구나무 세우기. 우리는 언제까지 가해자의 발언권을 필요 이상으로 보장해주어야 하는가. 이럴수록 ‘진짜’ 피해자의 언어는 점점 더 희박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해자 중심의 ‘한가한’ 논란이 아니라 피해자가 주인이 되는 ‘절실한’ 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