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한국영화 베스트 5
2020-12-31
글 : 송경원

올해의 한국영화 1

도망친 여자

올해도 홍상수냐고, 다른 영화는 그렇게 꼽을 게 없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둘 다 긍정한다.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시네마’들의 흔적조차 점차 희미해져가는 자리에서 홍상수는 시간의 풍화에 아랑곳하지 않는 시금석처럼 여전히 자신의 작업에 몰두한다. 그뿐이다. 그뿐이지만, 아니 그뿐이기에 홍상수의 영화는 시간을 비껴나 언제나 신비로운 순간들을 자아낸다. <도망친 여자>를 올해의 한국영화 1위로 꼽은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올해의 홍상수 영화”(듀나)다. 그저 관성으로 믿고 보는 작가의 신작의 신작을 뽑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백은 커지고 반복은 간결해지는데도 여전히 짙은 감정을 불러내는 홍상수 영화의 신비에 또다시 항복했다”(김소미)는 말이다. 둘째, 홍상수의 작업은 사방이 폐허가 되어가는 지금이라서 더 유효하다. “영화로부터 도망치는 것인지 영화로 도망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도망침이 2020년 가장 큰 위로를 준 것은 분명하다”(김철홍)고 할까.

<도망친 여자>는 얼핏 짧은 소품같아 보이는 구성에서 영화의 신비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고 있다. “점점 더 단순한 서사와 캐릭터로 미니멀리즘의 세계에 진입한”(홍은애) 이번 영화는 “즉흥 연주같이 전개되지만 교활하고 순수한 구조가 내장되어 있다”(송효정). “맛있는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친구와 인생을 나눈다. 영화를 보고 고양이를 자식처럼 다룬다. 마치 그게 전부인 것처럼.”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감독상 수상 시 시상자로 나선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의 소개는 이 영화의 맥을 정확히 짚고 있다. 이것은 “형상과 상황의 매치를 통해 본 ‘영화란 무엇인가’”(이지현)에 대한 화답이다.

영화의 자리가 소멸해가는 지금이 순간 이 질문과 화답은 더욱 절실하고 유효하다. 여느 영화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알 수 없으나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하지만 <도망친 여자>에 대해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알 수 없으니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영화라고. 가려지고 침묵할수록 투명해지는 영화의 신비. 그렇게 우리 모두는 “불안과 쓸쓸함 모두 감희가 마주한 스크린 앞에서 맑아지는 뜻 모를 체험에도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다”(김소미).

올해의 한국영화 2

남매의 여름밤

2019년에 <벌새>가 있었다면 올해는 <남매의 여름밤>이다. 신인감독의 데뷔작에 이렇게 고른 지지가 이어진 건 이 영화가 특별히 빼어난 완성도를 지녔거나 창의적인 실험 혹은 도전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남매의 여름밤>은 범상하다. 그리하여 일상이 어떻게 영화 속으로 스며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생 같은 영화다. “영화란 결국 보는 이의 시선 처리에 대한 예술”(송형국)인 까닭에 “대상에 대한 성실한 탐구”(김영진)는 그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영화에서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장면은 특별한 사건이 아닌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홍은애) 적절한 사례라 할 만하다.

범상한 순간들에 유독 온기를 부여하는 것은 어쩌면 기억에 대한 윤단비 감독의 태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벼랑에 선 인물들, 그들의 시간, 집이라는 공간까지 따뜻하게 어루만지는”(조현나)이 영화는 “쓸쓸함의 풍경들을 경유해 상실에 대처하는 오롯한 경험으로 다가간다”(송효정). “현실의 아픔을 공유하고 보듬어 공감으로 이끄는 연출” (허남웅)은 마침내 “자전적 조각과 영화적 대리체험, 그 사이에서 태어난 절묘한 노스탤지어가 세대와 경험을 아울러 모두를 추억하게”(김소미) 만드는 것이다. “<벌새>에 이어 한국 아트하우스영화의 계보를 만들어가는 수작”(듀나)은 그렇게 노을을 등진 채 우리 곁에 다가왔다.

올해의 한국영화 3

작은 빛

<작은 빛>은 치열하다. 감독의 자전적 기억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얼핏 느슨한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공장에서 일하던 청년이 뇌수술을 앞두고 가족을 만나러 간 날, 청년의 손에 들린 캠코더에는 사라져버릴 기억들에 대한 불안과 삶을 향한 의지가 동시에 찍힌다. 확신할 수 없음에도 찍는 것. 어쩌면 이건 영화라는 잉여로운 작업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정확한 답변인지도 모르겠다. “묵묵히 수행하는 진심의 영화”(송효정), “단단한 신인감독의 믿음직스러운 데뷔작”(박정원), “마음의 빛과 리듬과 운동으로 이뤄진 잔잔하고도 역동적인 풍경의 영화”(홍은미) 등 평자들의 상찬도 이야기나 기교보단 대상을 다루는 고민과 태도를 향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신성하고 무거운 카메라를 봉인한 뒤 꺼내든 일용할 양식 같은 카메라의 힘”(김소희)이다. “대부분 마스터 숏으로 여러 인물간 거리를 둔 채 롱테이크로 삶의 호흡 그대로를 담고, 클로즈업은 영화 속 영상기계장치인 카메라에 의해서만 과격하고 거칠게 표현됐다. 요 근래 본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클로즈업”(배동미)이라 할 만하다. 그렇게 조민재 감독의 카메라는 “남루한 곳에서 이미 조용히 빛나고 있는 것들을 일깨운다”(김소미).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을 단단히 붙잡고 사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영화”(조현나) 앞에서 한국영화의 작지만 환한 빛을 발견한다.

올해의 한국영화 4

사라진 시간

난해하다. 이해가 안된다. 불친절하다. 정진영 감독의 데뷔작 <사라진 시간>에 대한 대중의 첫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평자들은 정확히 그 지점에서 이 영화에 대한 지지와 응원의 목소리를 보낸다. “복잡한 미로에 용감하게 발을 디뎌 헤매고 넘어지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기어코 출구를 찾아내는 뚝심의 연출이 반갑다.”(허남웅) “시나리오 단계부터 정진영 감독은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 태도가 이 영화를 완성시킨 원동력 같다. 거칠게 두개의 정체성을 섞어 혼동하는 인물을 그려냈고 좀더 들어가면 인생에 관한 이야기로도 확장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영리한 연출”(오진우)이라는 설명이다.

그렇게 정진영 감독은 “야망을 숨긴 듯, 이야기하기의 야망을 깊숙이 품었고”(이용철), “영화의 정체성에 대담하게 질문을 던진다”(김영진). 비록 거칠지언정 감독의 욕망과 야심이 보이는 영화,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며, 올해 한국영화 중 가장 강렬한 정체성을 드러낸 영화”(김철홍)다. 한편으론 “전형적인 것들을 모아 전형을 무너뜨리는 방식은 익숙하지만 그 대화법이 너무도 은근하여 거부할 수 없다”(김소희). 그렇게 <사라진 시간>은 “파편화되어 있지만 공허하지 않은, 올해 가장 흥미로운 철학 영화”(김소미)로 기억될 것이다. “거칠고 빈틈도 많지만 그 사이를 계속 들여다보며 곱씹게 만들기에 또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에 담아낼지, 감독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조현나)

올해의 한국영화 5

소리도 없이

올해의 문제작을 딱 하나만 꼽는다면 아마도 <소리도 없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신인감독다운 야심”(김영진)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살인과 유괴를 소재로 다루면서도 중반부터 범죄 장르물의 클리셰를 영리하게 비껴간다”(조현나). “비유와 상징을 대놓고 보여준 다음에 관성적 해석을 거부하며 내달린”(남선우) 끝에 “한번도 보지 못한 스타일의 범죄영화”(이현경)로 거듭나는 이 영화는 두 가지 포인트에서 흥미롭다. 첫 번째,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남선우) 홍의정 감독의 신선한 연출이다. 범죄 현장을 묘사하면서 뒤에 아름다운 하늘을 포착하는 걸 놓치지 않는 식으로 “이질적인 두 요소를 계속해서 충돌시키는 것이다”(오진우). 그 결과 “피, 땀, 눈물로 액체적 접근을 시도하는 이 영화는 그 액체들은 서로 섞일 듯 섞이지 않으면서 이상한 느낌을 만들어낸다”(오진우).

두 번째 포인트는 배우들의 연기다. “<소리도 없이>는 ‘유아인의 변신’을 미끼로 삼아 도덕 문제를 숙고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특히 유아인에 감정이입하는 관객을 따돌리는 싸늘한 결말과 함께 비대한 남성 자아를 감별하는 포인트를 제공한다”(황진미)는 평처럼 배우의 아우라를 비트는 영리한 활용이 곳곳에 돋보인다. “기묘한 앙상블, 주목할 감독, 선을 넘지 않는 범죄” (배동미)가 어우러진 놀라운 데뷔작. 코로나19로 인한 “올해의 빈곤한 리스트에서 이 가난하고 신선한 영화를 지우기란 힘들 것 같다”(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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