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한국영화는 전례 없는 위기의 한복판에 놓였다. 극장엔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지고 영화가 관객과 만날 창구를 잃어갔다. 하지만 본질은 위기 앞에서 드러나는 법, 올해 한국영화가 내놓은 답들은 일말의 희망을 품을 만하다. 2020년 올해의 영화로 꼽힌 작품들의 특징은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1위에서 5위까지 5편의 영화 중 1위 <도망친 여자>를 제외하곤 모두 데뷔작이라는 건 의미하는 바가 남다르다. 10위까지 범위를 늘려도 신인감독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8위 <남산의 부장들>과 9위 <반도> 외에 7편의 영화가 전부 개성 넘치고 야심만만한 데뷔작으로 채워졌다.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코로나19로 인한 상영 환경의 변화다. 극장의 위기 상황에서 예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인감독의 데뷔작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수월한 측면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많은 상업영화, 대작영화가 개봉을 미루거나 OTT로 방향을 전환했고, 그 자리를 독립예술영화들이 채웠다. 그러나 외적인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이토록 다양한 시도와 다채로운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건 그간 감독의 자리가 보이지 않던 한국영화의 획일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기획영화들의 하향 평준화가 몇해 동안 반복된 것을 감안하면 이같은 흐름의 전환은 고무적이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은 이런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올해의 한국영화 1위는 압도적인 차이로 갈수록 단순해지고 깊어지는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가 차지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지만 늘 꾸준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홍상수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2위부터 4위까지는 근소한 차이로 <남매의 여름밤> <작은 빛> <사라진 시간>이 뒤를 이었다. 신인감독들은 각기 다른 맥락과 개성으로 각자의 돌파구를 만들어나가는 중인데, <남매의 여름밤>의 윤단비 감독은 최근 일련의 흐름을 형성한 90년대생 감독의 대표주자 중 한명이다. <작은 빛>의 조민재 감독은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독립영화의 한 경향을 선보인다. <사라진 시간>의 정진영 감독은 또 다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 배우 출신 감독의 성취를 보여주었다.
5위 <소리도 없이>와 6위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격차 역시 크지 않았다. 홍의정, 김초희 감독을 비롯한 여성감독의 활약은 이제 약진이라고 부르기 어색할 정도로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규모 있는 상업영화 중에선 우민호 감독의 <남산의 부장들>이 8위, 연상호 감독의 <반도>가 9위에 꼽히며 다양성을 더했다. <남산의 부장들>은 “스크린을 인물로 채우고, 머리 위에 조금의 틈도 주지 않는 답답한 프레이밍이 탁월했던 작품”(배동미)으로 답답했던 당대 현실을 반영한 미장센이 돋보였다. “실패를 자각한 자의 처절한 몸짓이 잊히지 않는다”(김소희)는 <반도>는 크고 작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연상호 감독의 동물적인 감각과 대중성, 기획력에 대한 상찬이 이어졌다.
<남매의 여름밤>의 윤단비 감독을 비롯하여 7위를 차지한 <에듀케이션>의 김덕중 감독, 10위 <여름날>의 오정석 감독처럼 빼어난 졸업작품으로 데뷔작을 선보인 감독들이 많아진 점도 흥미로운 변화 중 하나다. 그만큼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이 차례로 밀려온다는 방증일 것이다. “청년 세대를 대상화하지 않고 응시해보려는 노력”(남선우)이 엿보이는 <에듀케이션>, “멈춰버린 시간과 그 시간을 견뎌내는 마음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포착한 영화”(박정원)인 <여름날>처럼 동시대, 동세대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영화들이 한국영화의 다음 물결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식상한 말은 않겠다. 2020년, 폐허가 된 한복판에서 한동안 한국영화의 앞자리에 보이지 않던 감독의 얼굴들이 선명해지는 것을 마주한다. 본래 창작의 빛과 상상력은 크고 작은 제약 속에서 도리어 풍성하게 꽃피는 법이다.
한국영화 10선
01 도망친 여자
02 남매의 여름밤
03 작은 빛
04 사라진 시간
05 소리도 없이
06 찬실이는 복도 많지
07 에듀케이션
08 남산의 부장들
09 반도
10 여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