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있어. 우리 주위 모든 곳에.” <매트릭스>(1999)의 모피어스(로런스 피시번)가 네오(키아누 리브스)에게 매트릭스의 진실을 알려줄 때만 해도 가상 세계와 현실의 대결 구도처럼 보였다. 네오는 기계들이 만들어낸 가상현실 속에 갇힌 사람들의 해방자로서 설계자 아키텍트와 대립한다. 이때만 해도 매트릭스는 ‘현실이 아닌 어떤 것’인 양 취급됐고 결국 우리는 현실로 복귀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의 ‘가상’이다.
하지만 3부작이 모두 나온 지금에 와서 다시 보면 매트릭스는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현실이 아닐 이유가 없다. 20세기 말의 <매트릭스>가 가상현실을 말했다면, 21세기가 벌써 2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매트릭스>는 차라리 메타버스처럼 보인다. 현실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혹은 현실과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공간들은 이미 도처에서 발견된다.
게임과 영화, 멀고도 가까운
게임 내에서 콘서트나 공연을 즐기는 건 이제 별다른 뉴스거리도 되지 못한다. 에픽게임즈의 <포트나이트>는 3인칭 슈팅 게임이지만 게임에선 본래의 장르와 무관하게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지고 있다. 2020년 4월 <포트나이트>에서 개최된 미국 힙합 뮤지션 트래비스 스콧의 가상 라이브 콘서트에는 2770만명에 달하는 유저가 참여, 무려 2천만달러의 매출을 거뒀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온라인 이벤트가 점차 확대되는 시점에 메타버스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소식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에 힘입어 <포트나이트>는 게임에서 2021년 2월과 7월 단편애니메이션영화제인 ‘쇼트나이트’를 개최하며 게임 내 공연을 단발성 이벤트를 넘어 정기적인 문화로 정착시키려 노력 중이다.
<포트나이트>의 이용자라면 파티로열 내 빅 스크린을 통해 단편애니메이션을 무료로 손쉽게 관람할 수 있는 이번 영화제는 게임이 더이상 게임이라는 목적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걸 증명한다. 화면 속 화면(Picture In Picture, PIP)을 통해 아바타들이 모여 영화를 보는 광경은 이색적이면서도 익숙하다. 20세기 말 <매트릭스>를 비롯한 숱한 SF영화가 꿈꿨던 미래의 풍경 중 하나가 게임 플랫폼의 힘을 빌려 구현 중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게임의 영화화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에도 게임의 영화화는 숱하게 시도돼왔지만 이는 성공한 게임의 인기를 영화로 이식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툼 레이더>와 <레지던트 이블> 정도가 그나마 시리즈화되었고, <워크래프트>나 <페르시아의 왕자> <어쌔신 크리드> 모두 원작의 명성에 비해 아쉬운 결과를 남겼다. 원본을 그대로 따라하면 반복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듣고 반대로 원본에서 너무 벗어나면 기존 팬들의 반발을 산다. 이때 두 가지 평행선을 달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원본을 어떻게 새로운 매체 언어에 맞게 고칠 것인가. 동시에 원본의 매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게임 서사의 매력을 유지하되 영화언어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하나 마나 한 조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건 어쩌면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다. 게임과 영화, 두 세계는 분리되어 있으니 각각의 법칙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유니버스 전략은 다른 돌파구를 제시한다. 그동안 게임의 영화화, 반대로 영화의 게임화가 단절된 세계의 차원 이동을 강요해왔다면 유니버스는 하나의 세계(혹은 개념)를 창조하여 그 안에서 병렬적으로 개별 콘텐츠를 축적,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단순히 기존의 팬덤을 등에 업고 이어지는 시리즈를 확장해나가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다. 일단 세계관만 학습되면 그다음은 개별적으로 성공한 콘텐츠와 실패한 콘텐츠가 존재할 뿐 각색의 실패와는 무관하다.
이제 게임은 또 다른 우주를 개척 중이다. 게임 산업이 확보한 기술은 상상력과 결합, 다양한 가능성의 꽃으로 여기저기서 피어나고 있다. <포트나이트>처럼 온라인 공간을 활용하여 일종의 광장처럼 유저를 끌어들이기도 하고,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워크래프트>나 <디아블로> 시리즈처럼 탄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시네마틱 트레일러, 소설 등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소설, 드라마, 영화, 게임 등 매체간의 경계가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는 현재, 21세기 문화 산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유니버스’의 구축이다.
전통적인 방식에서의 콘텐츠는 다른 매체로 넘어갈 때 일종의 세금을 치른다. 세금의 이름은 다름 아닌 각색이다. 어디까지나 출발점이 되는 원본 콘텐츠가 있고, 이를 기준으로 다른 매체로 변환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원본의 그림자를 항상 빚처럼 떠안고 간다. 그러나 이른바 유니버스 모델들은 ‘각색’이라는 근본적인 인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기본이 되는 콘텐츠에서 1, 2, 3차로 확산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로서 동일한 위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원본을 어떻게 변용하는지가 아니다. 병렬세계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다. 프로젝트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유니버스 전략에서 세계관이란 목적이라기보다 콘텐츠들의 연결망이 구축된 결과물에 가깝다. 일단 한번 세계관이 형성되면 그다음 콘텐츠로의 확장은 그야말로 원본에 기대지 않고 무한하고 자유롭게 이어져나갈 수 있다. 여기엔 원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새롭게 이어질 다음 세계가 있을 뿐이다.
IP 유니버스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사실 유니버스 전략은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영화에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안정적인 성공 사례를 쌓아나간 것처럼 결국엔 개별 콘텐츠의 성공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게임, 영화, 소설 등 각각의 플랫폼이 높게 두르고 있던 장벽이 무너지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현재 한국의 게임사들은 유니버스 혹은 동일한 이야기와 세계관 아래에서 다양한 도전과 모험을 시도 중이다.
예를 들어 <배틀그라운드>의 크래프톤은 최근 마동석 주연의 단편영화 <그라운드 제로>를 선보였다. 이는 IP를 기반으로 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의 첫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크래프톤은 이른바 ‘펍지 유니버스’를 내세우며 단편영화, 웹툰, 웹소설,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포맷으로 세계관 창작에 열올리고 있다. <크로스파이어>로 유명한 스마일게이트의 경우 콘텐츠 제작사인 리얼라이즈픽쳐스와 협업, IP 개발 단계부터 게임과 영화에 함께 쓰일 콘텐츠를 기획 중이다. NC, 넷마블, 넥슨 이른바 3N이라 불리는 거대 게임사들이 게임 비즈니스 모델 개발에 몰두하는 사이 비교적 신생 개발사에 해당하는 곳들은 미디어믹스와 세계관 구축, IP 확장에 눈을 돌리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국내 게임들은 상대적으로 빼어난 기술력과 그래픽에 비해 이야기가 빈약하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하지만 최근 게임 업계의 발빠른 동향을 보면 이미 이야기의 중요성과 세계관 구축의 효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규모의 문제를 비롯해 현실적인 제약은 산적해 있다. 아직은 콘텐츠 확장 가능성이 미약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IP 유니버스 전략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지켜보고 싶은 건 그 끝에 디즈니와 같은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의 그림자가 희미하게나마 비치기 때문이다. 결국 길은 통하기 마련이고, 우리는 이미 게임과 영화가 공존하는 메타버스 안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