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은 음지 문화인가. “그렇다”고 답해야겠다. 일단 이 글조차 필명으로 쓰고 있다. 친구들과 직장 동료에게도 BL(Boy’s Love) 소설을 읽는 것을 숨기지 않지만 미디어에 본명을 내놓고 BL 독자라고 밝힐 용기는 없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16년 이전에는 BL 콘텐츠를 보는 일이 음지에서만 가능했다. ‘성인동’ 사이트에 가입 후 인증을 받아야만 소설을 볼 수 있었는데 소장본 예약도 정해진 기간에만 진행됐다. 당시 BL 독자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선 2008년에 발행된 <씨네21> 기사 ‘[야오이 알아보기] 남남녀녀상열지사가 더 짜릿하신가’에도 수록되어 있다. 기사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소설이 연재 중인 곳들은 엄격한 가입 절차를 거쳐야 하는 비공개 사이트라 주소조차 알기 어렵다’. 조아라(joara.com)에 가입 후 성인 인증만 거치면 연재소설을 볼 수 있고, 리디북스에서 손가락 몇번 튕기면 e북 단행본을 구매할 수 있는 현재의 시스템과 비교해 ‘성인동 시절’은 독자에게 암흑기로 느껴진다.
유통사가 앞장선 BL 상업화
리디북스를 비롯한 알라딘, 예스24와 카카오페이지, 네이버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최근 웹소설의 확장에는 플랫폼들의 공격적 투자가 배경이 되었다. BL도 상업 정식 연재와 출간작으로 끌어오고 독자층을 확대한 것이 유통 플랫폼이다. 더불어 음지의 조도를 확 밝힌 것이 <시맨틱 에러>의 영상화다. 최애소설이 실사화되는 것을 반기는 로맨스 장르와 달리 BL은 웹드라마화에 반대하는 독자도 존재한다. 판타지를 반영한 BL 공수를 ‘3D 사람’으로 보는 순간 상상력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시맨틱 에러>의 드라마화가 공개되었을 때 한 팬의 한숨 섞인 댓글은 이러했다. “살아생전 BL 소설이 드라마화되는 걸 볼 줄이야.” 오타쿠를 향한 일반인들의 잔혹한 질문을 해보자.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는 걸 헤테로 여성이 왜 좋아하는데?’ BL이 여성의 섹슈얼 판타지가 반영된 장르임을 분석한 최근의 논문(‘한국 BL, 소설의 섹슈얼리티 연구: 오메가버스(Omegaverse)를 중심으로’)에서는 ‘BL은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에 대해 말하고 표현하는 공간으로 기능해왔다’고 설명한다. BL 작품 속에 여성의 판타지가 녹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 BL 소설이 온라인에서 정식 e북으로 발행되며 상업화된 시점을 2015년 12월로 기준 잡는다. 이때부터 BL e북 출간에 앞장선 것이 리디북스다. 리디북스의 BL 점유율이 높은 이유는 비욘드 선작(리디북스가 운영하는 BL 출판사 비욘드에서 단독 출간하는 작품을 타 유 통사에서 일정 기간 판매하지 못하는 조건.-편집자)과 편의성 때문이다. 리디북스는 독자 취향을 반영해 작품마다 상세 키워드를 제공한다.
웹소설 독자 중 BL 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9.9% 정도로 추정된다(한국콘텐츠진흥원, 웹소설 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 2020). 시장 확대에 따라 네이버 시리즈와 카카오 웹툰 역시 15세 연령가의 BL 웹툰과 소설 페이지를 확장하는 추세다. 네이버 시리즈에서는 웹툰 <청사과 낙원>, 카카오 웹툰은 <비밀 사이>가 인기리에 연재 중이다. BL 독자의 구매력을 입증하는 사례가 있다. 알라딘 북펀드에서 열린 BL 소설 <패션> 소장본 최종 펀딩 금액 8억7895만6천원이었다. 팬들은 e북이 있음에도 18만원짜리 양장본을 구매한 것이다.
BL 척척박사도 아니고 한달에 신작 소설이 300종 이상 출간되는데, ‘BL은 OO이다’라고 함부로 정의내릴 수 없다. 취향이 확장된 장르 안에서 ‘BL 속 판타지 재현’을 함부로 뭉뚱그려 언급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모든 작품을 섭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아래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사견임을 밝혀둔다. 오메가버스나 헌터물, 게임물로 변주해도 결국 B‘L’에서는 사랑(Love)이 중요하기에 여성 독자의 이상향이 연애 장면에서 반영되기도 한다. 공수가 서로를 만나기 전에 문란했었는지도 하나의 키워드다. 특히 수의 존재를 인지한 후 다른 사람과 육체관계를 가진 공은 독자에게 탈락 목걸이를 받는다.
한국 BL의 사소하지만 확고한 특징도 있다. 한국은 인사도 식사 여부로 하는 나라가 아니던가. 설령 공이 수에게 집착해 그를 집에 가뒀다 하더라도 끼니는 제때 챙겨줘야 한다. 공은 수가 매끼 무엇을 먹었는지를 알고 싶어 해야 하고, 초등학교 영양사보다 알뜰하게 그의 영양을 챙겨야 한다. 여기에 요리까지 직접 하면 금상첨화다. 바야흐로 집착광공은 남의 손길이 닿은 요리가 수의 입으로 들어가는 꼴을 보기 싫어하는 법이다.
모든 독자가 BL 작품을 읽을 때 수 캐릭터에 자신을 이입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에게는 공수 모두 작가가 창작한 종이 인간(e북으로 출간되더라도 팬들은 종이 인간이라 부른다)에 불과하다. 이들의 연애와 독자 사이에는 안전거리가 확보되어 있다. 남남의 연애임과 동시에 남의 연애인 것이다. BL 독자는 피폐물에서 수가 고통을 당할 때조차 거기서 L(Love)을 발견한다. “피 칠갑을 한 수의 얼굴을 본 공의 오른쪽 눈썹이 잠깐 꿈틀했다” 등의 문장에서라도 그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이후 공은 수의 육체를, 수는 공의 정신을 쌍방 구원하는 형태로 사랑이 결실을 맺는다. 사극 무협 장르 안에서 공이 황제이고 수가 신하일 때, 권력은 공에게 있지만 수가 공을 도와 함께 전쟁을 겪으며 서로에게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고통을 겪은 후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독자의 가슴은 벅차오른다. 네가 거기 있으니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을 뒤져 오직 너 하나만을 찾아내 간절히 원해야 한다. 주변 인물들은 안중에도 없고 세상에 오직 단둘이 존재하는, 뭐 그런 염병첨병의 눈꼴시어 못 보는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그 세계 밖에서 오직 응원만 하며 공수 집에 붙은 벽지가 되어 그들을 바라보고 싶다. 이왕이면 침실 벽지면 더 좋고.
‘음지의 양지화’에 대한 논란
BL은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독자가 보는 장르다. 때문에 최근 학원물, 캠퍼스물, 오피스물에서 공수가 해선 안되는 것들은 대부분 현실 여성들이 꺼리는 것들이다. 여성이 창작자이기 때문에 공수 주인공이 눈살 찌푸리는 행위를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예를 들어 학원물에서 남자 고등학생들끼리 여성 신체를 희화화하는 대화를 한다면 공과 수는 절대 그 대화에 끼지 않는다. 오피스물에서도 남자 직원들끼리 여성 신체를 품평하거나 밤 문화를 즐기자고 할 때에도 공수는 완강히 거절하고 자리를 피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경쟁 사회를 반영하는 K-BL 독자다운 성향이 댓글에 나타날 때다. 학원물에서 수재공이 평범한 수를 따라 대학을 하향 지원하면 ‘공 대학 때문에 속이 탄다’며 댓글이 달린다. 캠퍼스물에서 공수가 절대 해선 안되는 행위 중 대표적인 것은 팀플에서의 무임승차다. <시맨틱 에러>의 장재영(공 캐릭터)이 추상우(수 캐릭터)와의 팀 과제에 뻔뻔하게 결석하는 초반 전개 장면에 생각보다 많은 독자들이 분노한다. 20대 여성 독자의 경우 ‘현실 속 내가 만난 무임승차러’들을 떠올린 것이다. 이는 오피스물에도 반영된다. 2019년 리디북스 BL 코믹 어워드 대상을 차지한 <온 오어 오프>의 공 강대형 이사는 능력 없이 로비로 일을 따내던 협력사를 정리하고, 사내에서 부하 직원들의 성과를 가로채고 업무 시간에 골프나 치러 다니는 임원들을 색출한다. 인기 소설이 웹툰으로 나온 <신입사원> 역시 김종찬(공)이 광고회사에 독보적인 ‘일잘’ 상사라는 설정인데, 인턴인 수의 성실함을 알아보고 인턴임에도 프로젝트 참여의 기회를 준다. 강대형, 김종찬 모두 비합리적인 사내 정치를 타파하고 능력 위주로 직원을 평가하는, 직장 내 상사 판타지를 담은 캐릭터다. 반면 금요일 퇴근 시간에 업무를 지시하는 상사가 주인공이다? 부족한 인성을 독자가 참아줄 수밖에 없는 강력한 무언가를 그는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혹은 공이나 수가 사랑 때문에 회사에서 커리어가 망가지는 것 역시 한국 독자들은 걱정한다. 사랑을 위해 전부를 거는, 2차원에는 없을 염병천병 연애를 보고 싶지만 와중에 사회생활의 감각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 작가나 독자나 공수나 성숙한 어른이니까.
물론 BL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BL은 여성을 배제하는 장르’, ‘공수 관계는 남녀 관계의 권력 구조를 반영한다’는 페미니즘 진영의 비판은 이 장르의 특성을 고민하게 한다. ‘여자가 내돈내산으로 웹툰 좀 보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지만 이 비판에 대한 답을 선명하게 내리지 않으면 소설과 만화를 맘 편히 즐길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최근 불거진 레진코믹스 웹툰 <킬링 스토킹>의 드라마화 발표에 대한 비판적 반응이 있었다. BL 중에서도 고어 장르로 분류되는 이 작품을 굳이 영상화해서 ‘음지의 양지화’를 하는 것이 맞느냐에 대해서는 나 역시 회의적이다. 더 두려운 것은 ‘BL은 여자가 소비하는 여자 장르’라는 인식이 있는 상태에서 ‘여자들도 고어한 거 소비하지 않느냐, 그런 판타지가 있는 거 아니냐’라는 오해를 사는 것이 대단히 우려되는 데다 그 많은 소설과 웹툰 중에 왜 굳이 이 작품이어야 하는가가 의문이다. <킬링 스토킹>이 해외에서 인기가 높다는 사실이 영상화 결정에 주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고, 인물의 잔혹함이 제작자에게는 도리어 상업적으로 분석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인공이 뒤틀린 여성 혐오로 폭주하는 원작의 영상화는 BL 장르에 대한 편견만 강화시키고, 잔인하고 선정적인 장면에 대한 반복적 과시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
BL은 여성이 배제되는 장르인가? 그에 대한 고민을 여성 작가들은 끝없이 하고 있다. BL에서도 공수 캐릭터의 조력자나 주요한 기능을 하는 조연을 유쾌하고 주체적 성격의 여성으로 설정하는 경향성이 높아졌다. 여성 캐릭터가 등장할 시 그 활용과 성격 설정을 고민해야 인기작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연재 후 단행본 출간이 일반적인 BL 시장에서 여성 독자의 의견은 실시간으로 반영된다. 다수 독자가 문제를 지적하면 이를 수용하고 단행본 출간 시 반영되는 사례도 많다.
유구한 클리셰가 코믹 소재가 되기까지
공과 수, 주인공이 남자일지언정 그것을 창작하고 소비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 BL 장르의 특성이다. BL은 아니지만 BL을 소재로 차용하는 만화들의 경우에는 여성 독자가 어떻게 이 장르의 주체가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BL 만화를 통해 10대 소녀와 할머니가 친구가 되는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에는 두 사람이 사인회에 당첨돼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는 장면이 있다. 작가는 우라라의 동인지를 보고 슬럼프를 극복하게 되었다고 이치노세 할머니에게 말한다. 작가의 이 말은 우라라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고 작가-이치노세 할머니-우라라의 과정으로 전해진다. 이 만화 안에서 BL은 우정의 열쇠로 작용함과 동시에 세 여성이 일상을 위로하고 인생을 긍정하도록 돕는다.
BL 장르의 클리셰를 스스로 풍자하는 BL 만화 <그런 공 캐릭터는 유행이 지났습니다>와 <절대 BL이 되는 세계 VS 절대 BL이 되고 싶지 않은 남자>는 또 어떠한가. 이중 후자는 일본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는데, BL에서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를 총망라해 웃음을 주면서도 주인공이 BL 속 조연 캐릭터라는 것이 혼돈의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공이 급발진해 학교 자료실 등에서 ‘아무도 못 듣는다’며 기습 키스를 하는 등의 장면은 BL 학원물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당연히 아무도 못 들을 리가 없다. 이 만화에서는 이런 장르적 클리셰를 비틀며 주인공을 지나가는 ‘조연’으로 설정해 자기가 속한 장르를 한껏 가지고 논다.
다시, BL은 음지 문화이고 트렌드인가? 동성애 코드가 담긴 작품이 나올 때마다 BL이 트렌드라고 기사화가 되는데 매년 트렌드라면 그것은 이미 양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앞서 소개한 작품뿐 아니라 당신이 봐온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 혹은 그것을 마케팅하는 방식에는 이미 BL이 녹아들어 있다. 애써 브로맨스라든지, 남자들의 뜨거운 우정으로 포장해봤자 BL 독자 눈에 그것은 그냥 사랑일 뿐이다. 보이스 러브. 사랑 말이다.
참고 문헌
이현지, ‘한국 BL, 소설의 섹슈얼리티 연구: 오메가버스(Omegaverse)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8
오혜진, 김효진 외, <원본 없는 판타지> 중 3부 보이즈 러브의 문화정치와 ‘여성서사’의 발명
박세정, ‘성적 환상으로서의 야오이와 여성의 문화 능력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 석사학위 논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