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희 미술감독이 생각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은 “무드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가 정의하는 무드란 “물리적인 공간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의 공기나 정서까지도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극장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경험”이다. 극장 밖을 나와서도 감정과 이미지들이 내내 생동하며 영화가 계속된다고 느끼게 해준다는 평이 좋았다는 류성희 미술감독은 <헤어질 결심>에 펼쳐놓은 미술을 통해 그가 믿는 ‘클래식’의 가치를 또 한번 구현해냈다.
- 캐릭터의 사연과 감정을 염두에 둔 채 작업에 녹여내는 것으로 안다. 시나리오를 읽고 서래(탕웨이)나 해준(박해일)의 감정에서 떠오른 키워드가 있나.
= 시나리오를 읽을 때 보물 지도를 보듯 뿌려진 키워드들을 수집한다. 처음 읽었을 때 목소리라는 키워드가 생각났다. 물론 대면해 취조하는 장면도 있지만 두 사람이 언어적으로 대화하기보다 서로 음성을 녹음해 듣는 것이 굉장히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산, 바다, 파도를 떠올렸다. 목소리와 파도는 모두 파장, 파동을 갖고 있고 그게 상대한테 전달이 되지 않나. 목소리가 갖는 울림과 진동이 파도로 이어져, 사랑한다 말은 못해도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어떤 파장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 서래와 해준의 집 인테리어도 이런 키워드를 반영한 것인가.
= 목소리, 산, 바다, 파도라는 키워드의 연장에서 서래의 집은 키워드를 그대로 상징화한 흐르는 듯한 푸른 벽지가 나온다. 파도 같은 형태를 띠지만, 또 멀리서 봤을 땐 산들의 능선 같은. 그래서 색감도 초록이면서 파랑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 한편 서래의 집 안에서도 거실은 (죽은 남편인) 기도수(유승목)의 공간이다. 거실은 어두운 나무 톤으로 만들었다. 기도수가 음악 애호가이지 않나. 조사해보니 음악 애호가들은 집안에 스피커와 방음장치를 설치해 음악을 스튜디오처럼 진동시켜 듣더라. 음악의 음파도 파동의 연장일 수 있고. 거실의 나무로 된 울룩불룩한 것들이 실은 문양이 아니라 거대한 스피커다. 기도수는 자기 세계를 완고하게 구축하고 있고, 음악을 들으려 문을 닫으면 서래는 단절된다. 그가 죽자 서래는 문을 열고 그 거실을 온전히 점령한다. 반면 해준의 집은 직선적이고 규격화된 느낌이다. 해준은 굉장히 반듯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자기가 정해놓은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해준이 와이프 정안(이정현)과 함께 사는 이포의 집은 열려 있는 느낌의 밝은 공간으로 그렸고, 벽지가 따로 없고 단일한 색채를 보여준다.
- 서래 집의 벽지, <산해경> 노트 등 유독 푸른 색감이 눈에 띈다. 파랑으로도 녹색으로도 보이는 드레스도 그렇고. 푸른 계통의 컬러 팔레트를 따로 지정했나.
= 서래가 가져온 <산해경> 자체가 산과 바다를 의미하기 때문에 파랑과 초록 사이를 오가며 색을 구현하려 했다. 박찬욱 감독님이 사진작가이기도 하셔서 색감의 미묘한 차이에 예민하다. 테스트 촬영을 할 땐 푸른색이 너무 따뜻해서 영화의 느낌을 방해하지 않게 조명 톤을 많이 조절했다. 촬영하면서도 감독님이 벽지를 포함해 색이 어떻게 보일지 여러 필터를 사용하며 조명에 신경을 많이 쓴 것도 사실이다. 감독님은 ‘이건 이런 색이야’라고 지정하진 않으셨지만 전형적인 팜므파탈의 느낌이나 감독님 전작에 자주 사용한 레드 계열 의상은 지양하려 했다. 반대되는 느낌의 노랑이나 코럴도 썼고.
- 박찬욱 감독이 주요하게 제시한 레퍼런스도 있나.
= 감독님이 많이 맡긴 편인데 경찰서 이야기는 많이 하셨다. 둘이 처음 만나서 교감을 나누는 무대가 경찰서니까 기존 경찰서와는 달랐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레퍼런스로 보내주신 사진이 있다. 거친 나무들로 구성된 사진이었다. 리얼리티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차원에서 경찰서의 외양이 기존과는 다르게 디자인을 시도했다. 일반 건축물이 갖는 볼륨을 텍스처가 가지는 디테일이나 점, 선 단위로 해체해 디자인하는 편이다. 경찰서가 두번 바뀌면서 취조실의 풍경도 바뀐다. 부산의 경찰서는 크고 번듯하며 취조실엔 석고판을 떠서 불규칙한 점들을 박아놨다. 반면 이포의 경찰서는 감독님이 보내준 사진처럼 러프하게 나무들로 만들었다. 리노베이션 공사를 하는 곳 한쪽에 가설한 듯한 느낌으로. 점과 선이 만든 면들이 두 번째 취조실에서 나무판으로 겹쳐진다. 볼륨을 해체해 점과 선을 만들고 이들이 만나 면을 이루는 이 과정이 거창하게 들리긴 해도 우리끼리 즐기는 재미 중 하나다.
- 이포는 가상의 지역이지만 현실성 또한 있어야 하는 공간이다. 이포의 리얼리티를 구현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
= 곰팡이다. 해준과 정안의 베드신에서 해준은 곰팡이를 계속 주시한다. 그것은 해준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이포의 특징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감독님도 이포가 가진 특징을 계속 보여주는 데 신경 쓰셨다. 안개가 많고 습한 곳이면 해가 쨍한 날이 많지 않을 거라며 곰팡이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 이포 경찰서를 구현할 때도 나무에 곰팡이가 슳어 있는 느낌을 주려 했다.
- 딱 한번 나오지만 굉장히 인상적인 세트가 원전(原電)이다.
= 그걸 알아봐주어 고맙다. (웃음) 모두 달라붙어서 제일 열심히 그래픽 작업을 한 부분 중 하나다. 정안은 수리에 강한 이공 계열 사람이라 집에서도 기호로 가득한 책을 본다. 그런데 기호 같은 것들은 정안뿐 아니라 영화 전체가 가진 추리, 수사, 미스터리의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이미지여서 그것들을 영화 사이에 삽입했다. 그 기호들이 거대하게 총집합한 것이 원전이다. 실제 원전에서 쓰는 기호를 모아 일일이 그래픽화했고. 원전의 이미지 자체도 우리가 늘 보았던 이미지보다는 전개도를 풀 듯 하나의 큰 기호로 전달하고자 했다.
- 모두가 입을 모아 아름답다 이야기하는 장면이 송광사 데이트 시퀀스다. 송광사는 시나리오에서 명시된 장소인가.
= 아니다. 굉장히 나중에 찾은 장소다. 둘이 그나마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는 공간을 찾아야 했다. 감독님이 찾은 곳은 워낙 유명하고 아름다운 곳이라 사람들도 많고 촬영 허가를 얻기도 까다로웠다. 마지막까지 결정을 못하다 극적으로 송광사로 결정됐다. 서래가 북을 치는 장면도 로케이션 확정 후 탄생한 장면이다.
- 서래와 해준의 결말을 촬영한 바다가 각기 다르다고 들었는데.
= 엔딩의 바다는 산이기도 하고 바다이기도 한 공간이어야 했다.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조수 간만의 차에 의해 거세게 파도가 쳐야 하는 공간이어서 동해와 서해에서 나눠 찍었다. 처음부터 관념적 공간과 정서적 공간을 나눈 건 아니지만 작업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을 아울러 이포라는 하나의 공간을 창조해낸 것이다. 그래서 이포는 특정 지역을 염두에 두지 않고 두 바다의 특성을 조합한 가상의 공간이다.
내가 꼽은 <헤어질 결심> 속 이 장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인간이 갖는 모든 예기치 않은 사건과 감정들이 생생하게 삶을 이루고,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파도를 맞으며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인생의 한 부분에 대한 은유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