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들
비밀이 많아 보이는 여자, 그런 여자를 관찰하고 수사하는 남자. 마침내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 수사물의 미스터리에 로맨스를 교묘하게 얽어낸 <헤어질 결심>의 이야기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이뿐만 아니다. 고소공포증, 불면증, 관음증의 모티브, 크게 2부로 나뉘어 여인의 비밀을 파고드는 플롯, 파도치는 바닷가를 뒤로한 기암괴석에서의 대화,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주인공의 자태, 제임스 스튜어트의 멀끔함과 비슷한 해준(박해일)의 품위까지 영화 곳곳엔 <현기증>의 인장이 넘쳐난다. <현기증> 말고도 히치콕의 냄새는 <헤어질 결심> 곳곳에서 풍긴다. 해준이 서래(탕웨이)의 집 안을 몰래 들여다보는 <이창>의 구도, 수사 대상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형사 그리고 남편의 죽음이라는 <사보타주>의 서사. 또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속 러시모어산의 아찔한 절벽과 인물을 비추는 앙각 구도는 기도수가 추락한 바위산 위의 해준을 연상케 하고, 비행기 추격 장면에서 넓은 수평의 풍경과 남자의 형상을 대조하는 롱숏은 광활한 바다에서 서래를 찾아 헤매는 해준의 모습과 겹치기도 한다.
전작 <스토커>에서도 드러난 <의혹의 그림자>와 <싸이코>의 영향, <현기증>을 보고 영화감독을 꿈꿨다던 박찬욱 감독의 과거를 볼 때 <헤어질 결심>에 나타난 히치콕의 색깔이 갑작스러운 사건은 아니다. 여기에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을 만들면서 <현기증>이나 히치콕의 영화들을 직접적으로 참고한 적은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니 <헤어질 결심> 속 히치콕의 잔상들이 박찬욱의 영화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하나의 열쇠임이 분명하더라도, 히치콕의 영화들을 일일이 나열하며 박찬욱만의 <헤어질 결심>과 비교하는 감상법이 정답이 아님은 명심해야겠다.
데이비드 린 <밀회>
히치콕의 영화들이 <헤어질 결심>의 전반에 여러 영향을 끼쳤다면 <헤어질 결심>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정서는 데이비드 린의 <밀회>에 담겨 있다. 박찬욱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밀회>는 <헤어질 결심>에서 보여주는 사랑 이야기의 원형이다. <밀회>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원만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던 로라가 기차역에서 유부남 의사 알렉을 만난다. 로라의 눈에 들어간 이물질을 우연히 알렉이 빼주면서다. 서로의 얼굴을 알게 된 두 사람이 다시 우연히 마주치고 같이 밥을 먹는다. 자연스럽게 같이 영화도 본다. 여느 사랑이 그렇듯 두 사람의 애정은 서서히 깊어가고, 로라는 성실한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잘못된 만남을 지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이 엄연한 불륜이자 위험임을 자각한 두 사람은 일주일에 단 한번씩, 겨우 한달여간 이어졌던 뜨거운 만남을 끝낸다. 이토록 단순한 사랑 이야기는 알렉과의 일을 회상하는 로라의 촉촉한 내레이션, 떠날 수밖에 없다는 기차의 운명과 조응하며 절절함을 더하는 둘의 눈빛, 이런 감각들이 만드는 사랑의 정동으로 가득 찬다. 물론 <밀회>의 마침표는 상대를 위해서라면 인생의 사랑일지라도 포기할 줄 아는 어른의 마음씨다. 사랑할 결심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헤어질 결심은 진정한 어른만이 할 수 있다는 <밀회>의 성숙함이 <헤어질 결심>에 고스란히 서려 있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밀회> 속 로라와 알렉의 우수 넘치는 사랑을 한껏 고조한다면, 구스타프 말러가 연인 알마를 위해 작곡한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는 <헤어질 결심> 속 해준과 서래의 솟구치는 감정을 완벽하게 전한다. 말러가 연인 알마를 위해 작곡한 <아다지에토>는 사랑의 격동과 삶의 고뇌를 선율의 강약으로 주저 없이 표현한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곡이다. 그러니 한창 단단해지던 해준과 서래의 사랑이 마침내 무너지고 깨지는 순간, <아다지에토>만의 풍부한 격정은 그 어떤 음악보다도 이들의 사랑과 아픔을 적절히 표현한다. 사랑의 환희와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명징하게 대비한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역시 <아다지에토>를 가장 강렬하게 사용한 영화 중 하나다. 평소 루키노 비스콘티를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며 인생의 스승으로 생각한다는 박찬욱 감독이 다시 한번 <아다지에토>의 부활을 이끌었다.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
“그는 영웅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미국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가 영화에서 맡은 배역처럼,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좋은 사람이지요.”(<로재나>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엘릭시르 펴냄, 2017) 얼핏 <헤어질 결심>의 해준을 말하는 듯한 이 구절은 사실 마이 셰발이 자신이 창조한 인물 마르틴 베크를 직접 설명한 어구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스웨덴의 부부 작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60~70년대에 발표한 북유럽의 유명 추리소설이며, 박찬욱 감독은 해준이라는 인물을 마르틴 베크 형사로부터 떠올렸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끈질기고, 논리적이고, 완벽하게 냉정하자’라는 마르틴 베크의 신조, 전국에서 가장 유능한 수사관이란 설정들은 해준과 똑 닮아 있다(물론 해준은 완벽하게 냉정하기에 실패하지만). 그러니 해준과 마르틴 베크, 히치콕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겹치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산해경>
해준의 인물상이 마르틴 베크에서 비롯됐다면, 서래의 정체성은 중국의 고전 지리서·신화집인 <산해경>에 깃들어 있다. 정서경 작가는 <헤어질 결심> 속 인물들의 성질을 특정한 자연에 빗대어 생각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해준과 서래는 영화에서의 언급처럼 바다를 좋아하며 바다에서 살아야 할 인물이다. 그렇기에 서래는 산에서 태어나고, 산에서 여러 고초(기도수와의 일, 외할아버지의 유골 처리 등)를 겪으면서도 늘 바다(해준)를 그리워한다. 결국 서래는 바다로 가 해준을 만나고, 바다에서 자신의 사랑을 주체적으로 갈무리하기에 이른다. 즉 정서경 작가는 서래의 기구한 운명을 <산해경> 속 산에 사는 물고기 인간의 상황처럼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산해경>에 얽힌 서래의 상세 설정은 영화의 최종 편집본에서 대부분 생략되었지만, 서래라는 미지의 인물을 파악하는 데 주요한 단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