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본 것인가. <헤어질 결심>은 보는 이들을 당황하게 할 영화다. 무언가를 보았지만, 끝내 무엇도 보지 못했다. 감춰졌기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투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너무나 선명해서 도리어 낯설다. 미스터리 없이 미스터리하고, 비밀 없이 비밀스럽다. 그러다가 마침내 감정을 서서히 퍼뜨린다.
복수, 비밀, 구조. 박찬욱의 영화에서 범죄보다 중요한 건 복수였고, 복수보다 중요한 건 비밀이며, 비밀보다 중요한 건 비밀이 드러나는 구조였다. 박찬욱은 이를 통해 관객이 끊임없이 자신의 예측을 수정해야 하는 게임을 세팅하는 데 능했다. <올드보이>에서 플래시백을 통해 비밀이 누설되면서 피해와 가해, 복수의 주체와 객체는 자리를 바꾼다. <아가씨>에서 3막 구조 속에 각자의 시점과 비밀이 누설되면서, 정보는 수정되고 범죄의 설계는 무력해진다. 어쩌면 그의 영화는 관객이 이야기 구조가 선사하는 반전에 속아 넘어가는 기쁨을 교육해왔다.
반면, <헤어질 결심>의 서사는 당황스러운 정도로 단출하다. 형사 해준(박해일)과 살인 용의자 서래(탕웨이)가 서로에게 끌린다. 해준이 감정을 외면할 때, 서래는 해준을 위해 사건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정보 따위는 무력하다. 다만 이를 통해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수사의 언어로 ‘왜’를 질문하는 해준에게 서래는 말한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박찬욱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 위해 시각의 교정을 시도한다.
안구와 막의 시점숏
서래의 남편이 절벽 아래로 추락한 채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 사건은 서래와 해준을 만나게 하는 일종의 도구다. 그와 동시에 시신은 영화의 시선에 대한 하나의 오브제로서 기능한다. 해준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시신은 이미 부패가 진행되어 안구 위에 개미가 기어다닌다. 눈 위를 기어가는 개미는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여성의 눈을 면도날로 자르는 것만큼 잔혹하게 보이는 데가 있다. 죽은 자의 시선 안쪽에서 본다면 눈 위를 기어다니는 개미는 하나의 얼룩처럼 보일 거다. 영화가 보여주는 또렷하게 보이는 막 위의 개미는 시신의 시선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주체 없는 시선이다.
영화가 재현하는 비인칭의 시선은 엄밀히 말해 주체 혹은 대상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의 매개로서 카메라에 비친 시선이다. 생선의 눈동자 안쪽에서 눈을 찌르는 사람을 보고, 휴대폰 액정 안쪽에서 표면에 비친 글자나 이미지 따위와 그 바깥에 놓인 사람의 얼굴을 동시에 본다. 이것은 대상의 시점숏이기보다는 차라리 얇은 막의 재현이다. 시선의 표면으로서 막의 재현은 시점숏의 개념에 의심의 시선을 던지게 한다. 시점숏은 흔히 이해하듯 캐릭터의 시선을 대체하는 숏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매개의 시선일 뿐임을 안구와 막의 존재를 통해 또렷이 드러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준이 망원경으로 들여다볼 때의 시점은 인물의 시점이기보다는 매개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옳다.
비인칭적 시점이 빈번히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 영화에서 인물의 시점숏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해준은 이따금 하늘을 보면서 안약을 넣는다. 그의 증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흐릿한 시점을 통해 해준의 안구를 보여줄 수 있겠지만, 영화는 이러한 방식을 과감히 포기한다. 대신 영화 내내 등장하는 자욱한 안개의 이미지를 통해 그것이 눈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계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인물의 상황을 체감하게 한다. 해준의 안약은 그가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관련된다.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눈을 크게 뜨고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눈을 감고 해파리처럼 투명해지는 것일 수 있다. 감지 않고 내내 뜨고 있는 눈은 이미 죽어버린 시체의 눈밖에 없기에.
수사와 사랑의 중첩
영화는 눈으로 들여다보는 행위보다 시차를 두고 무언가를 따라하는 행위에서 영화와 사랑의 본질을 발견한다. 해준의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서래가 알려준 방식은 상대방의 호흡에 자신의 호흡을 맞추는 것이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실제 접촉하는 장면은 드문 반면 거리를 두고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의 호흡이 자리한다. 수사의 맥락에서 중요했던 눈은 다른 방식의 감각에 자리를 내준다. 특히 소리에 의한 감각이 두드러진다. 영화는 서래의 말이 해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을 팝업 창을 띄우듯 연결하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은밀한 사랑을 요약한다.
시차를 둔 모방과 번역 행위는 수사의 본질과도 같다. 형사는 늘 사건이 일어난 뒤에 출동할 수 있고, 잠재된 사건에 대한 수사는 불가능하다. 용의자와 형사는 늘 사건 이후에야 만날 수 있으므로 형사는 용의자의 마음과 행동의 루틴을 늘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야 따라잡게 된다. 서래를 따라가는 해준의 움직임은 수사의 움직임과 자연스럽게 포개지고, 그 안에 감정 역시 숨길 수 있다. 반면 서래는 그 움직임에 내재한 사랑이라는 의미를 발굴해낸다.
해준이 서래를 관찰한 내용을 녹음할 때, 그의 행위를 다른 차원에서 반복하는 것과 동시에 보살핌의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 서래가 혼잣말하듯 죽은 것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때, 다시 이것이 해준의 손에서 한국어로 번역해 들려올 때, 언어의 움직임은 유희적인 동시에 애틋하다. 언어의 교환 속에 시공간을 뛰어넘은 새로운 공간이 은밀하게 형성된다.
마침내, 사랑
서사의 성립에서 서래의 캐스팅이 중요했고, 탕웨이는 곧 서사의 개연성이 된다. 비밀을 간직한 미스터리한 인물로 서래를 그린대도 영화는 훌륭했을 테지만, 박찬욱은 탕웨이가 지닌 고혹적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거나 장르적으로 미스터리한 인물을 그리는 방식 둘 다 벗어난다. 박찬욱의 여성 캐릭터라면 무언가 다르다. 그 다름의 징조는 단순하게도 피식하는 웃음에서 온다. 그것은 비웃음도 아니고, 신비스러운 비밀도 아니다. 잘 보지 않으면 놓칠 수 있지만, 피식하고 웃는 아주 작은 동작만으로 분위기를 압도한다. 그것은 수사와 범죄의 막을 깨고 들어오는 균열의 신호다. 그 웃음은 <아가씨>에서 돈 많고 순진한 아가씨에 불과했던 히데코(김민희)가 피식하고 웃으면서 기존의 캐릭터를 깨뜨리고 들어왔을 때, 혹은 <박쥐>에서 태주(김옥빈)가 뱀파이어가 된 뒤에 겪는 체험들을 순수하게 유희했을 때의 에너지를 능히 환기한다.
박찬욱의 영화는 사랑이 맺어지는 결말을 끝끝내 선택해왔다. 그것은 캐릭터들을 향한 헌사처럼 보였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와 미도(강혜정)는 자신들의 관계가 누군가의 설계에 의한 조작임을 알게 된 뒤에도 서로를 끌어안는다. <박쥐>에서 상현(송강호)과 태주는 몸이 타들어가면서도 끝내 함께 있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가씨>에서 히데코와 숙희(김태리)는 마침내 평등하고 단단한 결합의 이미지를 상연했다. 반면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같은 곳에 있되, 서로를 보지 못한다. 반면 서로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은 뚜렷하게 느낀다. 두 사람은 수사라는 연극을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 모든 시간들은 끝끝내 사랑의 시간으로 남는다. 사랑이냐 구조냐 하는 무용한 질문이 마침내 부서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