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범 편집감독은 박찬욱 감독이 대학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의 부친인 고 김희수 편집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을 편집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 때부터 해외에서 작업한 <스토커> <리틀 드러머 걸>을 제외한 박찬욱 감독의 모든 작품을 편집했다. 본격적인 편집 작업에 들어가기 전부터 시나리오를 보면서 작품의 의도, 구체적인 구성을 논의한다는 박 감독과 김 편집감독은 이번 <헤어질 결심>을 “이견 없이 편집점에 관해 소통”하며 만들었다.
- 많은 멜로영화를 편집했다. 예전에 작업한 멜로영화와 <헤어질 결심>이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했나.
= 박찬욱 감독이 “이번엔 사랑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처음부터 선언하더라. 그런데 박 감독이 만드는 멜로는 사람들이 통속적으로 알고 접한 멜로와 달리 굉장히 원초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현대인이 따르는 규범이나 미의 기준에 맞는 사랑이 아니라 운명적인 사랑을 다룬다. 사실 이건 고전영화에서 자주 다루던 소재인데, 박찬욱 감독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갔다. 이전에 내가 편집한 멜로영화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에 실패한 남자의 성장 드라마였다. 관객이 경험했음 직한 혹은 경험한 일을 아련하게 그려냈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이 아니라 인류의 탄생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감정을 관통하는 감정을 다룬다. 사랑의 감정이 억제되지 못하고 밖으로 흘러나올 때 재미있는 디테일들이 나올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이 그리는 멜로의 재미는 이런 지점에서 온다.
- 박찬욱 감독과 가장 오랫동안 작업한 스탭으로서, 박찬욱 영화의 편집이 주는 독특한 리듬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 같나.
= 박 감독은 매 작품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나도 예전 방식을 고수할 수 없다. 그러니 매 작품에서 시나리오 단계부터 디테일하게, 지문 하나하나와 행간에서 표현하고 싶은 부분을 고민하며 분석한다. 그리고 촬영 분량을 보면서 관객에겐 다소 불편할 수 있지만 시나리오에서 분석한 부분을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가령 관객이 예측하는 그림이 이어지면 영화가 단순해진다.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은 대담하게 생략하고 대신 다른 곳에 이어 붙인다. 처음엔 관객이 낯설게 느끼겠지만 5~10분 지나면 이런 스타일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컷 편집 방식을 자꾸 무너뜨리기만 하면 오히려 영화가 평범해질 수 있다. 작품에 따라 관객과 소통하는 지점, 좀더 효율적인 표현 방식은 다르며 그에 맞는 편집점과 편집 스타일을 잘 찾아가야 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편집하는 방식이 다른 작품에도 적용되진 않는다. 무엇보다 작품에 대한 해석과 견해가 감독과 일치해야 한다.
- 해준(박해일)이 형사로서 용의자 서래(탕웨이)를 몰래 관찰할 때 시공간의 벽을 자연스럽게 무너뜨리는 편집이 인상적이다.
= 사실 이런 식의 표현은 다른 영화에도 많이 나왔을 것이다. 다만 얼마나 효과적인가에 차이가 있다. 현장에서 찍은 영상은 서래의 긴 순간을 담는다. 사실 버리기 아까울 정도로 좋은 그림이 많았지만, 해준이 순간적으로 무엇을 보는 것이 그의 심리를 보여주기에 적합한지, 어느 정도 길이로 어떤 이미지를 취하는 것이 그의 시선에 맞는지 계속 고민했다. 미묘한 선택점을 결정하기 위해 감독과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 직접적인 표현 없이 사랑의 감정을 은유하는 영화다. 서래가 해준의 집에서 홍산오(박정민)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를 이해할 때 미용실과 해준 집을 잡은 숏이 교차되는데, 별개의 인물들이 사랑하는 방식이 병치되며 서로 설명되는 부분이 있다. 전자기기에 녹음된 음성파일을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신의 편집도 독창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고조시킨다.
= <헤어질 결심>의 핵은 서래와 해준이 만난 후 그들의 관계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있다. 해준은 표현을 잘하지 못한다. 보다 적극적인 건 서래쪽이다. ‘한번 더 만나려면 살인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이 현대인의 시각에서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은 아니다. (웃음) 이런 감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취조실 장면에서 피사체가 앞뒤에 놓여 있는 숏들을 보면 포커스가 맞는 대상이 왔다 갔다 할 거다. “말씀으로 해드릴까요, 사진을 보시겠어요?” 이런 질문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랑의 감정을 담을 수 있다. 이런 장면을 적절히 배치하는 구성이 겹겹이 쌓이다보면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말보다 호소력 있게 감정을 전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는 뒤로 뺐다. 멜로적인 부분을 좀더 부각하기 위해서는 후반부 감정이 더 올라갈 때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령 잠을 자지 못하고 수면 마스크를 끼는 장면은 뒤로 옮겼다.
- 마지막 장면에서 서래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기보다 그의 시점에서 구덩이 밖을 바라보는 숏을 쓴다. 정작 서래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자신들이 선택한 사랑이고, 바닷가에서 끝을 맞이하는 것 또한 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때 서래와 해준의 모습은 직접 보이지 않아도 된다. 서래는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 만조 속에 사라진다. 이후 해준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을 거다. 그렇게 그들은 누구의 눈에도 띠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 코로나19 때문에 후반작업을 아주 길게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편집도 여유롭게 했나.
= 작업하는 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지만 그만큼 만족감이 쌓이니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지더라. <헤어질 결심>은 박 감독이 재봉틀 대신 한땀 한땀 공들여 직접 짠 옷감을 꿰매 이음새를 만든 작품이다. 그만큼 그에게도 새로운 작업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작업에 몰두하고, 그렇게 공들인 편집이 쌓이고 쌓이면 감독과 편집감독 사이에 신뢰가 생기고, 그 신뢰는 곧 관객에게도 전해진다.
- 박찬욱 감독의 모호필름과 김상범 편집실이 같은 건물, 한층 차로 붙어 있다. 워낙 가까운 데 있는 만큼 영화 얘기도 많이 나눴을 것 같다.
= 이번에 칸국제영화제에 다녀온 이후에도 따로 저녁 식사를 두세번 했다. 와인도 마시고 어떨 땐 소주도 마시고. 영화를 공개하고 박 감독도 떨렸다고 하더라. 그건 혼신을 다해 영화를 만든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떨림이다. 앞으로 칸국제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보다 더 뛰어난 영화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지 않을까. 아마 박 감독이 해내지 않을까 싶다. (웃음)
내가 꼽은 <헤어질 결심> 속 이 장면
구소산 변사 사건의 진실을 알고 서래를 찾아간 해준
기도수(유승목)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된 해준이 서래의 아파트에 찾아가 따져 묻는 장면. 보통 배우가 의자에 앉으면 카메라도 함께 이동하며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데, 이 신에서 카메라는 고정된 상태로 불안정하게 서래의 모습을 잡는다. 이렇게 천장까지 높이를 부각하고 서래는 화면 하단에 작게 잡히는 숏을 붙인 것은 관객이 다소 낯설게 느끼도록 시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