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서 영화가 된다면
<메탈 기어 솔리드>‘잠입 액션’의 효시 <메탈 기어 솔리드>는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액션 시퀀스를 자랑한다.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개발자 고지마 히데오를 게임계 대부로 만든 이 불후의 명작은 그러나 정작 실제 영화화에 있어 2006년부터 제자리걸음 중이다. 일찌감치 주인공으로 낙점된 배우 오스카 아이작은 “사이키델릭한 밀리터리 호러”의 정수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했지만, <메탈 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2015)에서 한층 풍부해진 메인 빌런 빅 보스의 서사나 2018년 등장한 좀비 스핀오프까지, 한번에 다 아우르기엔 버거운 내러티브부터 깔끔히 정리하는 게 급선무다. 악당이 시스템 메모리를 읽고 플레이어의 조종에 코멘트를 더하는 등 메타적인 전개를 자랑했던 작품인 만큼 신선한 자극을 주는 영화 스토리텔링도 기대해볼 수 있다.
<레드 데드 리뎀션2><레드 데드 리뎀션2>는 애초에 대단히 많은 고전 서부극을 향한 선명한 오마주를 품은 게임. 주인공 아서 모건이 소속된 반 더 린드 갱단은 영화 <와일드 번치>(1969)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총 9가지의 도전을 수행하는 구성을 따라가다보면 챕터별로 특정 영화의 명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전투 장면들도 존재하는데, <내일을 향해 쏴라>(1969)에서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가 추적자들을 피해 절벽에서 강으로 뛰어내리는 신,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7)의 대규모 열차 강도 신 등이 대표적이다. 게임이 영화화된다고 해서 반드시 첨단의 스타일을 지향할 필요는 없으며, 때로는 우아한 고전으로의 회귀가 가능하다는 방증이 되어줄 작품.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맥스라는 이름의 10대 소녀가 친구가 총에 맞아 죽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으로 트라우마 가득한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시간을 돌리는 능력을 지닌 이 소녀의 선택을 따라 게임의 내러티브는 사소한 선택들이 현실을 완전히 재구성하는 극적인 나비효과를 실험한다. 게임 IP와 인터랙티브 영화의 만남에 있어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셈.
<소마>공포 게임 전문 개발사 프릭셔널 게임즈가 개발한 1인칭 생존 호러 <소마>의 주인공은 뇌 복제 실험에 참가하던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100년 후의 수중 연구 시설에서 깨어난다. 그곳에선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로봇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기술 발전으로 인한 디스토피아에 대한 명민한 의식과 함께 어두컴컴하고 복잡한 미장센이 자아내는 매혹을 내뿜는 이 게임은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네온사인 비주얼과는 전혀 다른 심해 SF이자 테크노 호러가 될 수 있다. 로봇 캐릭터의 몸 안에 유저가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중시한 게임과 같이, 영화에서도 인간과 기계의 일체감을 어떻게 구현할지가 관건이다.
<호라이즌 제로 던>2022년 넷플릭스가 시리즈 제작을 발표했다. 이 미래 세계에서 인류의 기술 문명은 퇴보했고 사회는 원시 부족 형태로 회귀한 것처럼 보인다. 대신 고도로 진화한 기계 형상의 동물들이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을 사냥하는 데 능한 젊은 여성 에일로이가 과거와 접속하는 기기 ‘포커스’를 활용하면서 판타지적 세계관이 확장된다. 방대한 오픈월드 액션 RPG로, 궁수 주인공의 특성상 활과 창을 이용한 슈팅 액션의 비중이 높다. 영화화 과정에서는 특히 현실의 문명 세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축된, 독특한 기후와 지형으로 뒤덮인 원시적인 미래 생태계의 풍광이 어떻게 묘사될지 궁금증을 낳는다. 인간과 자연의 역동적인 역학 관계를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로 풀어낸 <아바타> 시리즈가 <호라이즌 제로 던>의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가 될 것이다.
영화에서 게임이 된다면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자신이 지하 왕국의 공주 모안나가 환생한 존재라고 믿는 소녀 오필리아가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세개의 과제를 수행한다. 게임 역시 이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도 좋을 것이다. CG를 최소화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만든 음산하고 축축한 비주얼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완전히 대체하기란 어려울 터, 차라리 비주얼을 미니멀리즘적으로 압축해 캐릭터와 서사적 미스터리, 그리고 퍼즐 요소를 부각하는 호러 어드벤처 장르로 공략해볼 만하다. 기괴한 한편 어딘가 아름답고 애상적인 인디 게임 명작들 <인사이드>나 <리틀 나이트메어>가 좋은 사례다.
<존 윅>전략 게임 <존 윅 헥스>가 나온 바 있지만, 영화만큼 아드레날린 넘치는 액션을 게임으로도 생생하게 경험하길 원하는 팬들에게 지나치게 심플하고 깔끔한 턴제 전략 RPG인 <존 윅 헥스>는 확실히 역부족이었다. 체급을 키워 더욱 리얼한 그래픽, 슈팅과 맨몸 액션 등을 구사할 때 이른바 ‘배트맨 아캄버스’에 버금가는 타격감도 필요하다. 이런 수요를 알아차렸는지 제작사 라이언스 게이트는 지난해 <존 윅>을 AAA급(막대한 개발비와 마케팅비가 투입된 대작 게임) 비디오게임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내비쳤다. 성공적인 게임화 사례로 손꼽히는 <대부>에 알 파치노 등 주요 배우들이 성우로 참여했듯 키아누 리브스가 자신의 목소리로 개를 잃은 슬픔과 부러진 뼈를 추스르는 신음을 보태준다면 금상첨화다.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모바일 게임은 있지만 <기묘한 이야기> 세계관을 더욱 스펙터클하게 구현한 오픈월드 형태의 콘솔 게임을 즐길 수 있다면 그 감흥은 배가될 것이다. 인디애나주 작은 마을, 일급비밀이 숨겨진 실험실, 그리고 궁극의 뒤집힌 세계까지. 일레븐을 비롯한 친구들 일행이 되어 각기 다른 능력치와 성격을 가진 캐릭터를 옮겨가며 플레이하는 방식도 좋겠다. 핀란드 헬싱키 게임 본부를 설립하고 PC용 AAA급 게임 제작에 박차를 가한 넷플릭스가 초자연 미스터리 그래픽 어드벤처 게임 중 명작으로 손꼽히는 <옥센프리> 개발자들을 다수 영입했다는 사실도 <기묘한 이야기> 게임화에 대한 은근한 추측과 기대를 지핀다. 한편 넷플릭스는 빌런 베크나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VR 호러 게임 역시 이르면 2023년 겨울 출시를 목표로 준비 중이며 지난해 티저 트레일러가 첫선을 보였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고지마 히데오가 <데스 스트랜딩>을 개발할 때 팀원들과 함께 본 영화. 제프 밴더미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비주얼리스트 알렉스 갈랜드가 SF호러에 걸맞은 걸출한 시각적 상상력을 동원했다. 미국 국립공원 한가운데 형성된 알 수 없는 파장의 경계 ‘쉬머’ 너머로 5명의 여성 탐사대가 진입하는 것이 서사의 시작이다. 오로라가 벽을 형성한 듯한 쉬머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이미 충분히 게임적이다. DNA가 변형되어 인간과 동식물이 한몸으로 뒤섞인 크리처들은 곰팡이균 감염을 통한 ‘동충하초 좀비’를 지향하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와 교집합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