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불가능한 장소에 도달한 인터넷 세대의 호러
2023-04-28
글 : 김소미

백룸(backroom)은 그 텅 빈 표면과 달리 대단히 감정적인 장소다. 저조도의 형광등 아래 온통 광기 어린 노랑으로 물든 벽과 축축한 카펫.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어두운 통로와 지하 수영장, 용도를 알 수 없는 빈방, 하늘이 막힌 중정을 둘러싸고 실내로 나 있는 빽빽한 창문들…. 무작위로 분할된 약 6억제곱마일의 빈방을 시간과 공간 개념이 무너진 채로 떠돌게 되는데, 머지않아 그곳에 사람의 소리를 흉내내는 괴생명체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2022년 1월, 유튜브 채널 <케인 픽셀즈>에 <백룸>(The Backrooms(Found Footage))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9분짜리 단편영화는 현재 조회수 약 4750만회에 달하며, 이후 업로드된 15편의 짧은 속편까지 합하면 채널의 전체 조회수는 1억뷰를 가볍게 상회한다. 케인 픽셀즈를 운영하는 17살 감독 케인 파슨스는 덕분에 올여름 고등학교 방학을 이용해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할 예정이다. 지금 영화 제국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진보적 제작 집단 A24가 그에게 <백룸>의 장편 영화화를 제안했다. 케인 파슨스는 이제 <기묘한 이야기>의 제작사인 21랩스, <컨저링> <쏘우> <메간>의 공동 제작자 제임스 완(아토믹몬스터), <웨스트월드>의 작가 로베르토 파티노와 함께 페이크 호러 다큐멘터리 촬영을 앞두고 있다.

천재적인 17살 소년이 흥행시킨 단편영화 <백룸>은 영미권 온라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 전설들-크리피파스타(Creepypasta), 혹은 밈(meme)의 일종으로 시작됐다. 컬트 취향의 커뮤니티 SNS ‘레딧’, 대규모 이미지 보드 사이트인 ‘4chan’을 중심으로 꿈에서 본 듯한 기시감, 으스스하게 왜곡된 느낌, 나아가 상실감과 향수까지 자극하는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경계 공간)의 이미지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산업화가 낳은 실용적이고 획일화된 건축 구조, 그러나 종래의 사용 목적과 구성원들이 휘발되어 일상성이 완전히 결여된 곳. 리미널 스페이스는 말하자면 거대한 언캐니 밸리(불쾌한 골짜기) 그 자체다. 이름 그대로 ‘문턱 공간’인 이곳에 수많은 온라인 방랑객과 게임 유저들이 몰두하기 시작했다.

내재화된 아날로그 호러의 감각들

친구들과 공포영화를 촬영 중인 순간에서 시작되는 단편 <백룸> 오프닝 장면에서 소년 감독은 어떤 지점에 발을 디딤으로써 우연히 백룸이라는 평행 세계에 떨어진다. 이 과정엔, 이를테면 마블의 멀티버스적 설정이나 그럴듯한 스펙터클 따위가 전혀 없다. 이런 급작스러운 모션 혹은 장면의 전환은 노클리핑(통과할 수 없는 물체와 공간의 표면을 뚫고 진입하는 게임 속 치트 혹은 버그 현상)이라 불리는 게임의 문법으로서 온전하다. 세계관의 논리가 아니라 버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어서 펼쳐지는 백룸 또한 요컨대 3D 게임의 사각지대를 경험해본 세대의 감각을 극대화한 시공간이다. 비교적 최근 게임 중 예시로 들 만한 <사이버 펑크 2077>, <GTA> 시리즈의 공간 버그, 오래된 예로는 <슈퍼 마리오 64>의 비현실적인 공간감과 쨍한 색감이 개발자가 의도하지 않은 불쾌함을 준다는 점과도 닿아 있다. 비밀의 평행 세계 혹은 ‘미비한’ 구역들로 순간이동하는 당혹스러운 체험은 다시 밈이 된다(게임 커뮤니티 루리웹 유저가 올린 글 제목 ‘추락하다가 의문의 공간에 안착했습니다’). 달리 말해 백룸은 원본일 수 없는 운명이다. 백룸의 유행 한참 전에 출시된 어드벤처 게임 <스탠리 패러블>(2013)은 늦은 밤 어두컴컴한 회사 건물에 혼자 남은 플레이어가 제4의 벽을 넘나든다.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나,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공간을 조작하지 않으면 소름 끼치는 텅 빈 구조물들만 들어찬 풍경을 목도하게 되는 시뮬레이션 게임 <게리 모드>(2006), <마인크래프트>(2011)도 비슷한 효과를 낳는다.

이들 게임에서 우리는 어떤 벽을 통과해 방치된 공간, 말하자면 불가능한 장소에 도달한다. 이 지극히 게임적인 한계 혹은 단절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일 수도, 한없이 으스스한 것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유저는 때로 세계의 이면에 진입해버렸기 때문에 ‘어쩐지 들어오면 안되는 곳을 들어온 것 같은’ 불온한 기분에 처한다. 백룸은 무한히 반복되어 시각적으로 낯선 공간이기 이전에 바로 이런 감정적 불편함에서 생명을 얻는 문화적 코드다. 그것은 방치된 도메인에 잘못 접속했을 때 혹은 링크를 타고, 또 타고 들어가 마치 공간적으로 더 깊숙이 진입하고 있는 듯한 웹서핑의 느낌과도 일면 유사하다. <백룸>에서 불시에 튀어나오는 끔찍한 괴물은 2000년대 유행하던 공포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온라인 호러에 관해 파고든 책 <대체 현실 유령>의 나원영 비평가가 쓴 대로 “웹서핑을 하면서 링크를 잘못 누르면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두근거림과 두려움”의 형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온라인 밈, 영화, 게임을 초월하는 시간과 장소

리미널 스페이스를 극대화한 백룸 콘텐츠가 대박을 터뜨리자 게임계는 즉각 이를 흡수했다. 2020년대 백룸의 유행이 새로운 게임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과거로의 회귀다. 애초 케인 픽셀즈의 <백룸> 역시 1992년을 배경으로 VHS 카메라의 옛 폰트와 화질을 보여준다. 백룸을 활용한 대표적인 스팀 게임 <엔 터 더 백룸>(2021) 역시 의도적으로 조악한 그래픽과 노이즈를 부각했으며 2022년 출시된 <백룸 1998>은 대놓고 홈비디오 화면을 동원해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하는 1990년대 소년이 백룸을 헤매도록 한다. 지금의 기술력을 구부러뜨려 구태여 거칠고 깨진 픽셀의 이미지들 속을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 큰 공포(와 매력)를 느낀다. 지금 백룸에서 향수와 공포는 하나로 만나고 있다.

디지털 세대의 내재화된 리미널 스페이스적 감각이 게임과 밈으로 재현되고, 이를 재능 있는 창작자가 단편영화로 만들어 바이럴을 증폭시키며, 다시 그 코드를 게임이 확장하더니 나아가 장편영화가 된다. 이 굴레는 저예산의 독립적인 제작 시스템에서 비교적 상호작용이 자유로운 호러 장르의 산업적 특성에 기인하는 한편, 기억에서 점점 풍화되어 어느덧 기이한 지점에 다다른 과거의 공간을 계속 탐험하고 싶은 세대의 욕구를 반영하는 것일지 모른다. 여기서 다시 질문. A24는, 영화는 이 문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첫 번째 단편 <백룸> 이후 <케인 픽셀즈>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된 보다 구체적인 속편들은 여전히 흥미롭지만 점점 덜 으스스하다. 내러티브화할수록 납작하게 변모해버리는 백룸 콘텐츠의 맹점은 일정한 물체성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 디지털 이미지의 존재론과 동행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라는 문턱 공간에서 전유되었던 무의미하고 공허한 이미지들을 최초의 낯선 상태 그대로 텅 비어 있게 내버려두는 과감함일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스토리텔링이란 특효약이 아닌 시간과 장소에 대한 부지런한 탐구이자 믿음의 문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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