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스크린 포 플레이 -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통해 본 드라마와 게임의 속성
2023-04-28
글 : 신현우 (디지털 문화연구자, 평론가)

신체화되는 사건, 조형되는 공간

조르주 멜리에스가 촬영한 최초의 극영화가 상연된 지 한 세기가 흐른 지금, 우리는 디지털 게임을 두고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게이밍은 수많은 행위성이 복잡하게 겹쳐지는 위상수학의 세계다. 그것은 데카르트적인 평면(XYZ)이면서 벡터(W)를 가졌고, 불확정성의 공간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단순한 로직으로 선분들이 연결되는 고전역학의 좌표계이기도 하다. 플레이어들은 결국 가장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고, 거기에 익숙해지기를 추구한다. 무엇보다 게이밍은 사건을 신체화하는 경험을 동반한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탐험하고 만지면서 시공간을 조형한다. 영화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관객은 사건을 역사로서 인식하지만,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겪는 사건들은 신체 그 자체가 된다. 이 어긋나는 나선을 하나의 원환으로 잇는 방법은 없을까? 훌륭한 게임은 멋진 시네마나 TV쇼가 될 수 있는가? 멜리에스 이후 영화가 올드미디어들과 수없이 통접했던 것처럼 디지털 게임도 그러했다. 최근 원작 게임을 바탕으로 제작된 TV쇼인 <더 라스트 오브 어스>와 <위쳐>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등을 보면 이런 경향은 점점 두드러진다. 장르나 컨벤션만으로는 봉합되지 않는 의문들이 게이밍과 시네마라는 두 도시 이야기를 단절시킨다. 게임은 그만큼 시네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게임은 신체적이고 조형적이면서 복잡성 속에서 질서 찾기를 요구한다. 반면 시네마는 질서 속에서 차이를 반복시키고, 복잡성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성을 추구한다.

단절되면서 결속되는 합치(congruence)의 스크린

<HBO>의 이름값처럼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아주 단단하게 짜여진 작품이다. 원작 게임의 두 번째 시리즈인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를 둘러싼 개발자와 플레이어 사이의 다툼이 엄청난 사회적 갈등으로까지 비화된 만큼, TV쇼의 제작자들은 이 점을 의식해 원작이 구사했던 클래식한 로드 무비의 왕도를 고스란히 답습했다. 질병, 재난, 괴수, 무정부, 각자도생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방정식도 정석대로 풀어나갔다. 드라마는 느린 템포로 회를 거듭하면서 오래전 딸을 잃어버린 조엘(페드로 파스칼)과 비뚤어진 고아 엘리(벨라 램지)의 내면을 조망하고, 둘이 친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무게감 있게 그려낸다. 극작술은 군더더기 없이 훌륭하고, 특히 게임에서 조명되지 않았던 게이 커플 빌과 프랭크의 생애사가 3화 전체에서 다뤄지는 방식은 아주 세심하고 포용적이었다. 전체적으로 흠잡을 데 없고, 원작을 즐긴 팬들도 매우 호의적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성공은 게임과 과감하게 단절하면서 성취될 수 있었다. 그간 시도되었던 게임-영화간 컨버전스가 비아냥을 들으며 거부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원작 게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로드 무비를 서사적으로 전유하면서, 동충하초균 감염자들을 피해 다니는 퍼즐 풀이를 메커닉으로 한다. 플레이어는 레벨과 오브젝트를 조형하는 존재다. 위협을 피해 숨을 곳을 탐색하고, 때때로 탄환을 아끼며, 감염자들을 깨우지 않고 폐허를 조심스레 지나다녀야 한다. 축축하고 지저분한 콘크리트 무더기를 헤쳐나가는 그 숨가쁜 플레이의 순간들은 좀처럼 TV쇼에서 연동되지는 않는다. 게임을 통과하며 겪은 그 신체화된 사건들은 잊히고, 대신 담담한 장르적 연출이 이를 대신한다. 이는 아쉬움과 안도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한땀씩 조각칼로 깎아 내려가는 듯한 게임 속 조형의 감각은 여전히 손끝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배우들, 전통적인 시학이 그려내는 평면에서 최적의 길을 찾아 나가는 좌표 이동의 경험, 즉 사건과 공간이 신체에서 합치(congruence)되는 감각은 완전히 상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정교하게 재구성된 프톨레마이오스 지도가 됐다. 지구본을 돌려가며 세계를 만지던 그 질감은 축출된 것이다.

스크린 포 플레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개발자들은 게임이 플레이어 신체 내부에 생성하는 합치의 감각이 얼마나 폭발적일지 가늠하지 못했다. 합치는 말초적인 수준이 아닌, 정동적인 수준에서 이뤄진다. 게임 속에서 단순히 총을 쏘거나 욕설을 하는 등의 행위는 플레이어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배트로 공을 때리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직접 물건을 만지고, 대화를 선택하고, 공간을 더듬으며 스스로 스케이프가 되는 과정에서 정동은 크게 변화한다. 게임과 드라마에서 사랑받았던 주인공 조엘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에서 남성적 외모의 근육질 여성 애비에게 잔혹하게 맞아 죽는다. 그뿐 아니라 플레이어는 애비를 조작해 스테이지를 진행하는 수모까지 감내해야 한다. 게이밍의 강력한 합치 메커니즘은 플레이어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플레이어들은 “가부장적인 백인 남성이 허무하게 죽고, 흉측한 여성 되기를 강요하는” 교조주의라며 반발했고, 개발자들은 “비판적 사고를 거부하는 남성 편향적 소비자들의 반지성주의”라고 맞대응했다. 이뤄져야만 하는 합치의 소실점을 양쪽 모두 찾지 못했다. 개발자들은 장르 위에 작가주의의 시선을 더하고자 애썼고, 플레이어들은 안주하던 룸 포 플레이(room for play)를 떠나려 시도하지 않았다. 조엘의 신체와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는 플레이어에게 죽음을 강요함으로써(게이밍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플레이어에게 스스로 자결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정동을 크게 흔들었다.

시네마에서 이런 시도는 종종 성공적이다. 우리는 여전히 스크린 밖에 있으므로 그것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이밍이 시작되는 동시에 플레이어의 피부는 스크린의 질료가 되기 때문에 행위성을 생성하는 인물들은 더욱 세심히 다뤄질 필요가 있다. 이는 성인지 감수성이나 정치적인 지향과는 별개의 문제이며, 미디어가 사용하는 전략 혹은 윤리에 관한 것이다. 결국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도전적인 컨버전스를 추구하기보다는 안정감, 즉 TV쇼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들로 재매개될 수밖에 없었다. 게이밍과 드라마 사이 공역에 도사리고 있을 스크린 포 플레이(screen for play)의 탐색은 유예됐다.

스크린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는 미디어 전략에 해당하지만, 스크린을 어떻게 가지고 놀 것인가는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다. 게이밍은 ‘입법자 되기’의 경험을 특히 강조하는 측면이 있는데, 우리는 반복되는 게임 플레이에서 최적의 승리 시나리오, 경우의 수와 목적 없는 기쁨을 좇는다. 게임 메커니즘을 이해하며 변수를 줄여나가는 과정, 충실히 정해진 룰을 따르고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은 게임이라는 기계가 수학적 질서도로부터 위상들을 만들어 포개고 있음을, 이 안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의 성격이 재현보다는 입법에 더 가까움을 보여준다. 이것들은 더 급진적으로 뒤섞일 필요가 있다. 언리얼 엔진 또는 유니티 엔진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탐색과 조형이 가능한 시네마-내-공간의 설계, 재창작으로 다시 그려지는 인물들(예컨대 조엘을 죽인 애비의 전사는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2에서 훨씬 더 시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등이 생각될 수도 있겠다. 평면이 아닌 구형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침내 횡단하는 스크린 포 플레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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