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폴라로이드 작동법> 이후 곧 20년. 베테랑의 구력을 지녔지만 정유미는 지금도 깨끗한 맨살로 부딪치고 연기한다. 점입가경의 몽유병 스릴러 <잠>의 수진(정유미)은 남편의 기행에 곧잘 경악하는 순진무구한 젊은 아내인 듯싶더니, 어느새 맑은 얼굴 위로 집요한 광기를 발산하는 이야기의 지배자로 거듭난다. 결정적 순간에 튀어나오는 정유미만의 본색은 <보건교사 안은영>에 이어 <잠>에서도 그 효력이 선명하다.
- 비평가주간에서의 첫 상영이 열린 미라마르 극장에서 <잠>을 처음 봤다고. 무대 위에서 박수받는 일에 서먹해하는 모습은 여전히 신인배우 같더라.
= 지난해 <잠> 촬영을 마친 뒤 한동안 영화·드라마로 공식 석상에 설 일이 없어서 그런가 영 어색하다. 아직 시차 적응이 덜 된 상태여서 약간 멍한 것이 차라리 다행이지 싶다. (웃음) <잠>은 사운드 효과가 무척 중요한 영화여서 작은 숨소리까지 공들여 후시녹음을 했는데 극장에서 완성된 버전을 처음 보니 확실히 느낌이 색달랐다.
- 무서운 영화를 전혀 못 본다고 알고 있다. <잠>은 호러까지는 아니지만 오컬트적 요소가 분명한 스릴러인데 어떤 매력에 이끌려 선택했나.
= 계획한 건 아니지만 <82년생 김지영>과 <보건교사 안은영>을 하고 난 이후 좀더 콤팩트한 작업 속에 들어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부부의 집을 중심으로 꾸려진 로케이션뿐 아니라 프로덕션의 진행 방식과 일정까지 모든 것이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작품이었다.
- 수진은 관객이 저마다의 해석을 첨부하고 유추하게끔 만드는 인물이다. 임신과 출산, 커리어 문제로 좌절하는 남편과 아버지의 부재,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어머니와의 관계 등이 관찰되는데, 여러 디테일 중에서도 가장 명확한 부분은 부부가 둘이서 함께한다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여자라는 사실이다.
= 부모의 관계로부터 받은 영향이나 현재 결혼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불안 같은 것들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일부러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수진으로 존재하는 시간 동안 나를 둘러싼 사람과 환경으로부터 받는 영향에 솔직하고 싶었다. 대본에 표현된 것 너머의 것들에까지 과하게 다가가지 않는 것이 최근 몇년간 중요하게 생각한 작업 방식이다. <잠>에서도 아침마다 유재선 감독님과 회의할 때 자주 부탁했다. 내가 표현해야 할 영역, 혹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하나하나 전부 다 알려달라고. 감독이 원하는 그림에 최대한 근사치로 다가갈 때 배우로서 가장 기쁘기 때문이다.
- 챕터가 바뀔 때마다 감정적으로 극적인 전환을 보여준다. 얌전하던 인물이 은은한 광기를 표출하기 시작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 아! 광기에 대해서라면, 더 해보고 싶은 게 많다. <보건교사 안은영>과 <잠>이 시동을 걸었다. 아직 제대로 된 광기는 보여드리지 못한 것 같다. 지금 정도로 광기라 하기는 좀 약하지 않나? (웃음) <잠>의 후반부에선 감독님이 이건 너무 무섭지 않냐고 되물을 정도로 프로덕션 디자인이 주는 몰입감이 있었고 그에 힘입어 연기했다. 배우가 놓인 환경, 의상, 분장 등이 연기에 끼치는 영향력을 언제나 신뢰한다.
- 이선균 배우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첩첩산중> <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로 세번이나 호흡을 맞췄다.
= 단편(<첩첩산중>)부터 시작해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로 만나면서 이선균 배우와는 함께 근육을 다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아침마다 대본을 받아서 원신 원컷으로 촬영하는, 밀도 높은 작업을 3번이나 함께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한 일인 것 같다. 테이크를 여러 번 반복하는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를 경험한 때문인지 유재선 감독님의 촬영장에서는 서로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호흡이 맞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