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영상 전문지 <오큘로>와 출판사 미디어버스에서 발간하는 오큘로 총서의 1권으로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가 출간됐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서울과 도쿄 등 곳곳에서 참여했던 강연의 기록이 1부에, 2009년 11월 이케부쿠로의 극장 ‘시네마 로사’에서 나흘에 걸쳐 진행한 연속 강의가 2부에 실렸다. 두 파트를 가르는 뚜렷한 기준은 강연이 상이한 시공간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했는지, 혹은 한곳에서 잇달아 이뤄졌는지다. 어쩌면 편리한 편집 구성일 따름이겠지만, 이는 개별 영화가 아닌 영화라는 것 자체에 대해 말해보겠다는 이 책의 결연한 다짐에 꽤 부합하는 구분으로 보이기도 한다. 파편적 부스러기들과 모종의 덩어리가 하나의 두께를 이룬 이 책과, 수많은 단절 그리고 연속으로 기워진 “파탄난 미디어”인 영화의 특징이 공교롭게 마주하기 때문이다.
한 세기, 즉 100년을 특정 매체의 경향을 분석하기 위한 범주로 삼는 일도 아리송하지만 그 안에서 영화의 동태를 일정하게 규정하는 행위 또한 녹록지 않다. 사반세기를 앞둔 작금에는 또 다른 방향의 지도를 그려볼 수 있겠으나, 여하간 이 책은 2000년대 초반 신세기를 맞이한 거장이 겸허하게 내놓은 관측과 전망을 소상히 담고 있다. 게다가 그것들이 오늘날 어떻게 적용되고 비껴갔는지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 난감한 주제 앞에서 겸연쩍어하면서도, 2부에서 ‘리얼과 드라마’, ‘지속과 단절’, ‘인간’, ‘21세기의 영화’로 분류한 네개의 강연을 통해 과거의 영화를 돌아보고, 영화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의심하고, 닮고 싶은 영화에 감복하고, 최종적으로는 미래 영화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하여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는 단순히 21세기에 공개된 영화들의 면면을 톺아보는 게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를 가능케 한 이전 시대의 제도/질서/태도를 확인 및 수정하면서 점차 동시대로 전진하는 발자취의 기록이다. 오즈 야스지로, 오시마 나기사, 테오 앙겔로풀로스 등으로 대변되는 20세기의 유산들을 지나 야쿠자물 V시네마와 할리우드의 상업영화, 아니면 영화의 꼴을 하고 있지만 실은 영화가 아닌 것, “사기꾼”이자 “영화를 이용한 것” 등을 가져와 영화의 토대를 질문한다.
직업인으로서의 고백
21세기를 말하기에 앞서 주어져야 할 20세기란 구로사와가 영화를 보고 익히고 만들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화와 연관된 구로사와의 모든 경험, 기억, 견해가 어수선하게 펼쳐진 것이 이 책의 1부다. 실로 다양한 영화를 나열하며 성실한 비평을 시도하는 구로사와는, 이따금 독자를 다소 당혹스럽게 할 만한 문장을 자주 반복한다. ‘영화를 찍어본 적 없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는 창작과 그 이외의 행위에 미적 위계를 부여하는 논의라거나 자신의 예술적 고행을 생색내려는 발화로 들리지 않는다. 차라리 구로사와의 이 말은 직업인으로서의 진솔한 고백이다. 그에게 영화란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것이라, 그것을 만드는 행위 중에 있을 때조차도 끊임없이 어색하고 황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영화가 불합리한 상태에서 발아하는 유약한 자질을 갖췄음을 발견한다. 가령 현장에서 감독이 각본에서 벗어난 결정을 내리려 할 때 스탭들이 반대하는 경우를 회고하며 그는 말한다. “‘그게 아니라, 다른 식으로 찍고 싶다고’라고 말하면, 아니나 다를까 ‘그래도 각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는데요…’라고 대답합니다. ‘그걸 쓴 게 나라고. 그 내가 이렇게 바꾸고 싶단 소리니까 괜찮다니까’라고 짜증이 나서 소리 지르고 싶어집니다.” 그가 “연약한 장르”인 호러에 푹 빠졌던 것처럼 그는 영화에 부착된 이 나약함에 매혹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만든 사람을 지우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려는, 영화. 그렇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장면을 찍고 자르고 이어 붙이는 사람으로서 영화감독은 도대체 무얼 하는 사람인가. 구로사와는 기다리는 능력, 오케이하는 재주가 감독에게 필요하다고 술회한다. 이토록 의뭉스러운 수식으로 관계하는 단어들은 역설적으로 연출가에게는 더없이 성립 가능한 개념들이다.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히 있으면서 그러나 아직은 없는 것으로서의 영화를, 감독은 매번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로사와는 20세기로 한없이 돌아간다. 뤼미에르 형제의 <뤼미에르 공장의 출구>는 특히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어느 공장의 출구가 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나와 어디론가 향한다. 이들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만 끝끝내 보이지 않은 영역으로 넘어갔기에 무궁해진다. 작가의 자질만 받쳐준다면 인물의 마음 구석 모서리에 구겨진 심정까지 표현할 수 있는 문학과 달리 영화는 영상을 기본값으로 전제하는 터라 언제나 3인칭으로부터 출발한다.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음성을 빌리지 않고는 명확히 할 수 없으며 설령 보이스 오버 등에 의지하더라도 그것이 모종의 요소들과 (부)조화롭게 공존할 때 서술과 화면의 일치를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구로사와에게 카메라는 겨우 오려낼 줄 아는 기계이며 무언가를 담아내는 가장 ‘리얼’한 그릇이면서 기껏해야 그 정직함밖에 갖추지 못한, “부아가 치미는” 사물이다. 이를 통해 세계에서 도려낸 영화라는 조각이 탄생한다. 이는 자연히 미지의 것, 여기 없는 것, 즉 바깥의 감각을 환기한다. 그렇게 21세기의 영화, 즉 “불시에 드러나는 외측”을 노출하는 영화들이 대두된다. 그 영화들에는 우연히도 강(江)이 흐르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몹시 서글펐던 어떤 강의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매우 주관적인 감상이지만) 마지막 챕터 ‘21세기의 영화’에서 구로사와가 은밀하게 의식하고 있는 듯 느껴지는 어떤 영화 속 장면이다. 불경하게 찬란한 해파리 떼가 출현한 도쿄의 강. 젊은 남자가 그 강가를 따라 달리며 눈물을 흘린다. 구로사와는 21세기 영화를 말하기에 앞서 이미 어떤 미래의 풍경을 자기 영화에 깊게 각인시켰다.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는 이와 같이 각자에게 새겨진 강물을 하나둘씩 꺼내게 만들, 아름다운 강연록이다.
“저는 영화가 ‘마음에 든 하늘의 구름’이나 ‘굉장한 풍경’에 어쩌다 단 한번 맞닥뜨리게 된 그 순간을 즉각적으로 카메라에 담는 데서부터 성립하는 표현이라 생각합니다.”_ 73쪽
책에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온건한 관점이 엿보일 때도 있다. 예컨대 실사영화의 원형(archetype) 없는 풍경을 긍정함으로써 그는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가르고, 후자를 정확한 영화라고 명명한다. 1부의 4장 ‘영화와 로케 장소에 관하여’에서 구로사와 아키라가 하늘의 구름 모양이 마음에 들 때까지 기다렸다는 일화나 어느 감독이 멀리 서 있는 전신주가 보기 싫으니 자르라고 주문했다던 에피소드를 언급하면서 그는 통제 불능한 자연의 가소성, 일회성이 지닌 결핍의 ‘능력’을 옹호한다.
“지금 여기라는 장소로부터 외부로 향하는 움직임 혹은 눈에 보이는 안쪽과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바깥쪽의 관계를 다룬 영화, 요즘 제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게 그런 영화들뿐이군요.”_ 239쪽
거의 예언이다. 또한 물론 자신의 21세기에 관한 주문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스스로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폭력의 역사>와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밝힌 <도쿄 소나타>에는, 전자에서 착안한 가족이라는 울타리와 후자에서 기인한 바다라는 장소의 차단성이 강렬하게 집약되어 있다. 과연 나갈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모두를 집중시킨 피아노 연주 뒤에 켄지가 부모와 입시장을 나가려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질 때, 그에게서 아직 시선을 거두지 못한 관중은 이미 실내를 떠난 이들을 고요하게 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