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특집] 이름 없는 존재들, <민중들의 이미지: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
2023-12-07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민중들의 이미지: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지음 | 여문주 옮김 | 현실문화A 펴냄

수많은 영화에서 단역, 엑스트라는 이름이 없다. 그들은 거리를 지나가는 익명의 시민이거나 사건 뒤편에서 주인공을 지켜보는 행인들이다. 그들은 배경에 머물러 있으며 집단으로 화면에 포착된다. 그러나 영화가 탄생하던 즈음에 연극무대와 구분되는 영화의 특별함은 배경을 포착하는 힘에 있었다. D. W. 그리피스가 영화의 아름다움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능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안타까워하지만) 영화는 사건 뒤편에 있는 것들, 중심에서 이탈한 자들, 너무 하찮고 범상하기에 눈에 드러나지 않던 것들을 형상화하는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민중들이 노출된다”라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중들의 이미지: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에서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민중의 형상이 결핍/과잉 노출이라는 이중적 사태에 직면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사진과 텔레비전 화면에 분명 노출되고 있지만, 이른바 ‘모자이크 처리’되어 노출된다. (…) 한편에선 가려진 얼굴이, 다른 한편에서는 흐릿해진 얼굴이 있다.”(19쪽) 오늘날의 민중은 너무 많이 드러나지만,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불투명한 얼굴을 갖는다. 민중의 이미지를 조직하는 것은 이 모순적인, 그러나 동시대의 이미지 지형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필리프 바쟁의 사진과 고야와 렘브란트의 회화, 그리고 로셀리니와 파솔리니, 에이젠슈테인과 왕빙의 영화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환경에서 나타난 시각적 도상을 시대적 구분에 구애받지 않고 결합하는 이 책은 민중의 표상을 둘러싼 이중구속을 타개하는 저항의 방법을 모색한다. 디디 위베르만은 민중의 형상을 조직하는 방법론의 한 가지 예시로 ‘단역’(figurants)에 주목한다. 단역은 예술적 위계에서 가장 하부에 존재한다. 아무것도 아닌 배우인 단역은 그러나 그 안에 모든 형상(figure)을 포함하고 있는 가능태의 단어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나 복수형으로 주어지는 단역의 형상에서 영화를 공동체의 장소로 수용하는 민중의 힘, 이미지를 두 사람 이상의 결합으로 제시하는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의 문장 안에서 에이젠슈테인의 <파업>에 나오는 인민들의 시신은 동시대적 민중의 형상으로 ‘시대착오적’인 형상화를 이뤄낸다.

“카메라는 피사체의 얼굴과 전면을 프레이밍할 수 있는 기회를 오랫동안 놓치게 될지라도 그 피사체를 뒤따라간다. 그것이 무엇이든 예견하거나 명령하길 거부한다. 카메라는 ‘선취하지도’ ‘포획하지도’ 않는다. 그저 ‘뒤따라갈’ 뿐이다.”_ 298쪽

하지만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저술이 민중의 얼굴과 목소리가 나타나는 것을 순진하게 긍정할 뿐인 것은 아니다. 영화의 카메라는 민중의 형상을 노출하고 형상화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카메라는 민중의 뒤에서 그를 뒤따라갈 수밖에 없다. 디디 위베르만은 왕빙의 <이름 없는 남자>를 서술하면서 역사와 대면하는 이미지의 힘을 ‘뒤따르는’(Suivre) 카메라에서 찾는다. 강제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무릅쓰고 촬영된 사진이 그렇듯, 이미지는 현재를 일으키는 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또한 영화는 그 이미지를 선점하거나 포획할 순 없다. 영화는 조금씩 늦게 뒤따라갈 것이다. 그 미세한 격차가 디디 위베르만의 시선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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