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펑크: 마크 피셔 선집 2004~2016 1: 책 영화 텔레비전
마크 피셔 지음 | 대런 앰브로즈 엮음 | 박진철, 임경수 옮김 | 리시올 펴냄
k-펑크(punk)는 영국 비평가 마크 피셔가 2003년 개설한 블로그의 이름이다. 록 음악, 포스트펑크에 대한 열렬한 관심을 바탕에 둔 음악 저술가이자 2000년대 초 1인 미디어의 새 장을 연 문화 이론가인 마크 피셔는, 사이버의 그리스어 어근 ‘kyber’의 앞글자를 따 학계와 주류잡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강도 높게 토론을 지속할 장소로서 자신의 블로그를 ‘k-punk’라 명명했다. 2017년 그의 사후에 블로그 게시물을 중심으로 매체 기고글, 인터뷰, 미발표 원고를 방대하게 엮은 824쪽 분량의 <k-펑크>가 나왔고 국내에서는 리시올 출판사가 이를 4권으로 나눠 출간할 예정이다. 올해 9월에 나온 <k-펑크: 마크 피셔 선집 2004~2016 1: 책 영화 텔레비전>(이하 <k-펑크 1>)은 문학, 영화, 텔레비전에 관한 글들을 중심으로 엮었다.
링크와 댓글을 타고 흩뿌려진 글들 사이로 즉각적인 이동이 가능한 블로그의 특성을 감안하면 이 책을 반드시 순서대로 완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미권의 케이블 채널 분석, 텔레비전 예능 등 한국 독자들에겐 다소 낯선 레퍼런스들이 등장하거나, 마크 피셔의 언어유희가 번역으로는 생생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 방대한 인용이 종종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동시대의 곤경을 혁신적으로 사고하는 피셔의 논리는 대체로 주의력을 잡아끈다. 특히 윌리엄 S.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에서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네이키드 런치>로, <네이키드 런치>와 <스파이더>의 비교로, <폭력의 역사>와 히치콕의 영화의 대조로, <비디오드롬>과 <엑시스텐즈>에서 “디지털 시대의 진부함”으로 이어지는 글들의 전개는 마치 하나의 완성된 서사시를 방불케 한다.
앞선 피셔의 히트작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에서 그는 <칠드런 오브 맨> <월·Ⓔ>, 리얼리티쇼 <슈퍼 내니> 등을 아울러 동시대의 “지친 체념의 흔적”을 읽어낸다. <k-펑크 1> 역시 밸러드를 필두로, 버로스, 크로넌버그를 통과하며 후기 자본주의가 반자본주의적 문제의식까지 포섭한 서사를 익숙하게 펼쳐 보이는 아이러니를 지적하고 있다. 현대의 병리학이 반체제적 독기를 잃어가는 과정과 이것의 ‘대안 없음’까지 직시하는 <k-펑크 1>은 그렇기에 (피셔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우울과 비극감을 독자 역시도 피할 수 없는 책이다.
“<폭력의 역사>는 21세기 미국이 폭력이 억압된 이면으로 남아 있는 나라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고 있는 나라임을 시사한다.”_ 227쪽
크로넌버그의 영화 <폭력의 역사>에서 주인공 톰 스톨에겐 또 다른 자아 조이 쿠색이 있다. 피셔는 이를 두고 “쿠색의 환상으로서의 스톨이 스톨의 환상으로서의 쿠색보다 훨씬 흥미롭다”고 짚고 <폭력의 역사>를 스톨의 환상으로 읽는 비평에 일침을 가한다. “이 설명이 잘못된 까닭은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에 대한 이해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과 같은 ‘몽상적인 현실 탈출’이라는 해석- 두 영화는 긴 꿈 시퀀스로 해석되어왔다- 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독해는 궁극적으로 영화의 존재론적 위협을 잠재우려는 시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영화의 모든 변칙적 특징을 내면의 섬망 탓으로 돌리면서 평면화한다.”
이어지는 <폭력의 역사>에 대한 재정의는 한층 더 날카롭다. 21세기 미국의 폭력은 이면에 억압된 것이 아니며, <폭력의 역사>는 비정하고 직설적으로 이를 노출함으로써 마지막 장면에서 톰 스톨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내 가정의 모든 풍경이 언캐니하게 보인다는 것이 피셔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