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과의 대화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지음|이계성 옮김 | 미디어버스 펴냄
아피찻퐁 위라세타꾼과 태양, 틸다 스윈턴, 아서 C. 클라크, 인도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 늑대 등이 우주를 유영하며 대화한다. 대화 주제는 대개 관념적이다. 청소년 철학 서적의 뉘앙스에서 시공간의 허상성, 꿈의 정체, 차원의 분류 따위가 논의된다. 이 정체 모를 이야기의 작가는 AI인 GPT-3다. 실제의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감독이 “틸다, 위라세타꾼, 태양, 쿤티, 그리고 늑대는 걸으며 얘기를 나눈다. 미지의 차원으로 진입하면서 시작되는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지어내라”라는 식의 명령어 95개를 AI에 입력하고, 그 결과물에 조금의 편집과 조정을 가한 것이다. 등장인물들 역시 AI가 재구성한 가상 인물(혹은 행성)들이다. 실제 이름과 부분적인 정보만 따왔다.
GPT-3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주 놀랍거나 획기적이진 않다. 전술했듯, 오래 논의되었던 주제들의 재설명에 가깝다. 아피찻퐁이 탁월한 영화적 구조와 이미지로 증명해왔던 사유들을 말로 되풀이하니 외려 매력이 반감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아피찻퐁의 영화가 으레 그랬듯 중요한 점은 형식과 전체적인 형상의 기획이다. 나아가 그 형식 내외의 작은 변화들이다. AI가 만들어낸 이야기엔 종종 ‘기계 환각’이라 불리는 새로운 상상이 탄생한다. 원천 데이터엔 없던 특정 내용이 새로이 조합되는 일종의 비정상성이다. 가령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이 2021년 1월8일 50살에 암으로 사망했다”라는 (우리 기준의) 잘못된 정보가 기재된다. 그렇게 같은 듯 다른 역사들, 교묘하게 중첩되는 차원들이 생겨난다. 즉 이야기는 단순한 데이터의 나열이나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창작자로서 작동한 AI의 작품이 된다. 우리 세계의 실재를 오리고 붙여 또 다른 세계를 드러냈던, 분명한 거짓의 역량을 선보였던 아피찻퐁의 지난 작업과 궤를 같이한다.
GPT-3가 만든 1부 ‘태양과의 대화’가 끝난 후, 책은 2부 ‘팻과의 대화’에서 아피찻퐁과 MIT 미디어 연구소 팻 파타라누타론의 실제 대화를 전한다. 여기서 둘은 AI가 주재할 미래의 영화, 예술을 논한다. 작금 예술가들이 AI의 등장에 느끼는 불안을 과거 카메라의 등장 시기에 빗댄다. 카메라 때문에 회화가 멸종할 것이란 당대의 예측은 외려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색다른 층위의 예술가를 낳았음을 복기한다. 이에 아피찻퐁이 덧붙인다. “미래가 자연스럽게 펼쳐졌으면 해요.” 21세기 영화 미학을 이끌었던 아피찻퐁은 여전히 차후의 예술을 바라보고,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 작업을 하고 나서, 배우들과 일하는 건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이쪽으로 움직이세요. 1m요. 2m 더요.’ 이런 식으로 말이죠.”_ 106쪽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은 AI와의 협업에 실사영화 촬영보다 더 높은 자유도를 부여했다고 밝혔다. 인간 제작진과 배우가 영화 만들기란 단일의 목표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과 달리, AI가 외려 더 독자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덕이었다. 이 사실이 아피찻퐁 감독에게 있어 실사영화 작업의 대안적 미래가 될지, 혹은 죽음이 될지는 더 지켜봐야 할 문제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