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특집] 사진과 영화의 관계를 묻다, <식물성의 유혹: 사진 들린 영화>
2023-12-07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식물성의 유혹: 사진 들린 영화

유운성 지음| 보스토크프레스 펴냄

영화는 사진으로만 구성될 수 있지만, 사진은 영화로 채워질 수 없다. 이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특권을 주장하려는 바가 아니다. 영화평론가 유운성의 세 번째 저작 <식물성의 유혹: 사진 들린 영화>는 영화의 위기에 관한 상투적 언술이 다시 엄습하는 시기에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수단을 심약하게 옹호하는 대신 영화가 될 수 있는 ‘사진’과 사진에 속할 수 없는 ‘영화’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되짚는 책이다.

“영화가 초당 24장의 사진으로 구성되건, 사진이나 영화가 모두 픽셀과 비트의 조합물이건, 이는 우리가 사진과 영화를 실제로 지각하는 경험적 차원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책이 향하는 곳은 느슨하게 겹쳐진 사진과 영화가 불화와 공존을 이루며 형성하는 이중적 픽션의 장소다.

유운성은 조금씩 의미를 조정해가며 ‘픽션’이라는 단어를 거듭 불러온다. 사진과 영화의 결합은 현실과 허구, 혹은 스크린 바깥과 프레임 안쪽을 관통하며 그 안에 잠재하는 픽션의 가능성을 향해 던져진다. 영화는 카메라에 담긴 현실의 기록과 허구적 장치들이 경합하는 이질적인 투기장이다. 이 책이 말하는 ‘픽션’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구체적으로 픽션이 무엇이라고 선언하는 영토의 구분이라기보다 영화와 사진의 겉면에 감지되는 상이한 감각과 영화 내부에서 생성되는 특별한 긴장을 말하기 위함이다. 두 매체의 불화와 공존은 책의 3장인 ‘사진적 인물과 영화적 인물’에서 급진적으로 제기된다. 장 외스타슈의 다큐멘터리 <알릭스의 사진>을 경유해 “영화의 내부자들은 도저히 생각하기 힘든 방식으로 영화에 접근한” 사례, 즉 영화의 바깥에서 영화의 관습을 진동하고 갱신한 사례들로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의 영화 작업(<나와 내 동생> <풀 마이 데이지>)을 거론하는 이 단락에서 유운성은 사진이라는 명료한 대상이 영화의 표면에 잠입했을 때 생겨나는 미세한 흐트러짐과 붕괴를 발견한다. 영화에 잠입한 사진은 연출된 허구와 채집된 기록의 윤곽을 흔들고, 그 안에 담긴 피사체의 정체성을 재구축하도록 이끈다. 그렇게 사진은 영화의 이미지, 시제, 존재론적 위상을 변형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간극에서 사진과 영화가 나누는 매혹적인 교환에 동참하는 비평적 모험이자 오늘날의 ‘영화’를 형성하고 지지하는 토대가 무엇인지 캐묻는 날카로운 심문이다.

“프랭크가 본격적으로 영화에 투신한 1950년대 후반은 영화적 인물의 존재론적 양극성을 활성화하는 문제를 두고 여러 영화 작가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씨름하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프랭크가 <폴 마이 데이지>를 제작하던 무렵,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다큐멘터리스트인 장 루슈가 <나, 흑인>에서 존재론적 양극성을 띤 영화적 인물의 형상화라는 도전에 임하고 있었다.”_ 81쪽

교과서적인 서술에 오염되어 있는 우리에게 50년대는 고전영화의 체계가 흐트러지고 현대영화가 출현하는 시기다. 그런데 누구나 쉽게 말하는 ‘현대영화’가 정작 어떤 힘과 방향으로 나타난 결과물인지 해명하는 이는 드물다. 유운성은 이 시기에 접근하면서 작가주의와 특정 사조의 혁신을 배제한다. 영화를 전환하는 개입은 창작자와 매체와 산업 안팎의 긴장이 빚어낸 동시적 효과다. 그러니 “작업의 전환을 이끄는 것은 창작자의 개인적 충동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는 매체의 충동이 아닐까?”(75쪽) 지금 50년대 영화에서 발견된 변화를 말한다는 것은 작가주의와 현대영화 전반에 대해 다시 서술하기를 요청하는 제스처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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