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우리의) 한국영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금정연, 정지돈 작가
2023-12-07
글 : 이우빈
사진 : 오계옥

“싸대기는 할리우드에 없는 한국의 고유한 액션입니다.” “저는 늘 최동훈을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 생각해왔어요.” 당최 무슨 말들인가 싶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이하 <섬광을 보았다>)를 읽다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금정연, 정지돈 작가가 ‘한국영화’에 대해 주고받은 상념들에는 이제껏 생각지 못했던 한국영화의 새로운 면모들이 가득하다. 역사엔 제대로 남지 못했으나 한국인의 기억과 정서를 지배하는 비천한 영화들의 목록, 과거에 고인 채 나아가지 못하는 한국영화계의 현재가 산발적으로 소개된다. 본 책은 영화 글에 꾸준히 천착해온 두 작가가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 연재했던 ‘한국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을 묶은 단행본이다. 다만 그들은 고의로 길을 잃었다. 통상적으로 정해진 ‘한국영화의 길’을 의도적으로 이리저리 비껴간다. 이 샛길에서 발견한 한국영화의 의미야말로 이제 정말 발굴해야 할 한국영화의 속살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 올해 여름과 추석 극장가의 한국영화는 챙겨 봤는지.

금정연 안 봤다. 지금 기록을 살펴보니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한국영화가 <정직한 후보2>인 것 같다.

정지돈 <콘크리트 유토피아> 한편 봤다. 평가는….

- 한국영화에 대한 책을 쓰면서 최근의 한국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는.

금정연 한국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하나의 문화라면 한국영화를 보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한 문화이지 않을까. 한때는 극장에서 열심히 한국영화를 봤던 관객이 요즘엔 그러지 않는다는 사실부터가 의미 있는 것 같다. 꼭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챙겨 보거나 하루에 2~3편씩 영화를 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국영화를 향유하고 이야기할 수 있겠단 생각이 있었다.

정지돈 의문스럽다. 방금 질문에서 언급한 텐트폴 영화들을 과연 한국영화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제작, 배급, 상영 규모가 크다고 해서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영화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할리우드영화의 공식과 정서를 그대로 베낀 경우가 많다. <기생충>은 미국인들이 좋아하고, 반대로 한국인들은 <인터스텔라>를 한국적인 정서로 소비하는 경향도 있지 않나. 이런 면에서 요즘 극장가의 한국영화를 진짜 ‘한국영화’라고 느끼지 않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 “우리가 하려는 게 비평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둬야겠다” (196쪽)라고 적었다. 이 작업이 비평이 아닌 이유는.

정지돈 이건 비평도 쓰고 해설도 많이 하는 정연씨가 설명해야겠는데.

금정연 모르겠는데, 어… 비평이란 용어에 각자 투사하는 의미가 제각각이기에 말하기가 어렵다. 특히 영화평론은 문학평론과 달리 저널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도 해서 더 모호한 느낌이 있다. 우리 작업도 광의에서 보면 비평이라 할 수 있겠지만, 협의의 기준을 들면 남들이 보기에 영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종의 면책 조항으로 저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정지돈 책에도 인용했는데 영국의 영화평론가 빅터 퍼킨스는 <영화로서의 영화>(1972)에서 “이 책은 영화를 판단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준(criteria)을 제시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즉 어떤 기준에 미달하거나 충족하는 작품들을 줄 세우고 별점을 매기는 작업이 비평 작업의 근원임을 부정할 순 없다. 그게 사라져서도 안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비평적 작업이 직업적인 비평가들이 아니라 모든 관객과 리뷰어들에게 전염됐다는 사실이다. 특정 리스트만을 따라서 영화를 보고 별점을 매기다 보니 다양한 영화, 다양한 방식의 영화 보기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금정연 <영화로서의 영화>의 부제는 ‘Understanding and judging movies’다. 영화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게 평론의 역할이란 말이다. 평론가라면 자기만의 세계관, 영화관을 기준으로 해서 특정 영화를 옹호하고 반대하며 승부를 내야 한다. 다만 나와 정지돈 작가는 이런 식으로 특정 한국영화를 지지하거나 비판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비평적 작업이 아니라고 말한 감도 있다.

- 다양한 영화 보기의 부재는 책 속에서 다룬 ‘비천한 영화’란 키워드와도 맞닿는 부분이다. <살인의 추억> 같은 작품은 정전에 올랐지만, 다른 영화들은 당시 인기를 끌었음에도 역사적으로 기록되지 않는단 의미다.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금정연 한국 소설이 외국에서 10만부 팔렸다고 하면 대성공이라며 기뻐하는 기사가 나오곤 한다. 그런데 과거에 <드래곤 라자>가 해외에서 30만부 팔렸단 사실은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문단에서 인정하는 순문학 작품 같은 게 아니라서다. 비슷한 종류의 작동이 영화쪽에도 있는 느낌이다.

정지돈 예를 들어 미국엔 로저 코먼 사단이 만든 영화들을 소비하고 그 맥락을 향유하는 역사가 B급영화라는 키워드 안에서 길이길이 남을 수 있었다. 반면에 한국에선 주류 외 특정 영화들의 의미화나 맥락화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어릴 적에 재밌게 봤고, 삶의 정서와 철학에 영향을 끼친 영화들이 한국 사회나 평단에선 제대로 취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록키4>가 그런 영화다. 저급한 반공영화라는 당시 영화 잡지들의 여론 때문에 어디 가서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각자의 경험을 통한 다양한 영화적 명명과 실천이 있어야 영화 문화가 풍부해질 텐데, 영화 시장이 작아서인지 한국 문화계 전반의 문제인지 우리 DNA의 특징인지… 잘되진 않은 것 같다. 대신 비천한 영화라든지 쿠소 영화, 시네마 지옥 같은 세대별 단어들을 통해 본인들의 영화적 경험을 풀이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 이제 영화가 주류 대중매체에서 벗어났기에 차후의 영화 문화가 더 비관적으로 흐를 것이란 의견도 있다.

금정연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얘기했던 맥락과 비슷해 보인다. 소설이란 매체가 끝났다는 게 아니라, 국민국가를 형성했던 18~20세기 초반의 문학적 기능이 사라진 지 오래란 주장이다. 이제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문학만 남았단 뜻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20세기에 자본주의 체제의 부흥과 밀접하게 연관하며 영화가 짊어졌던 정치, 사회적 역할은 없어졌다. 그러나 영화의 외연을 좀더 넓힌 영상 문화의 가능성은 아직 무궁무진하다고 본다. 텍스트 매체가 노화하면서 라이트노벨, 웹소설조차 30~40대가 읽는 현상과는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다.

정지돈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공간 2개를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로 얘기하곤 한다.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 공급 방식이 한때 전세계적 문화 체제를 지배했다. 하지만 한국 텐트폴 영화의 약세가 증명하듯 이제 과거의 배급, 소비 시스템은 완전히 무너졌다. 과거의 예술들은 대체로 이런 단계를 밟아왔다. 하지만 영화는 더 이전의 예술들과는 다르다. 클래식 음악이나 무용과 다르게 복제 가능한 예술이라서다. 그러니 영화 매체가 하락세에 접어들었을 때 과연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을지는 역사적으로 미지수인 것 같다.

- “인간은 항상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라고 적었다. 영화를 사랑하긴 하는 것인지.

금정연 사랑하는 영화들은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진 잘 모르겠다.

정지돈 그럼 사랑하는 영화들을 말하는 데 실패한 건가?

금정연 그래서 아예 얘기를 안 했다.

정지돈 <알로하> 얘기했잖나.

금정연 제대로 길게 쓰진 않았으니까….

정지돈 <타짜>도 많이 말했는데.

금정연 사랑하진 않는다! 중요한 영화라곤 생각한다.

- 한국영화에 전하고 싶은 말은.

금정연 그동안 고생했고, 앞으로도 더 고생하자.

정지돈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 좀 많이 만들어주면 좋겠다. 애인이랑 극장에서 볼 영화가 없다.

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

요나스 메카스 지음 | 금정연 옮김 | 시간의흐름 펴냄

“요나스 메카스가 영상을 가지고 했던 걸 나는 글을 가지고 하고 싶은 걸까? (중략) 지돈씨에게 전화가 왔다. 곧 출간될 우리의 책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의 제목을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로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물론 메카스의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에서 빌려온 제목이었다.” 금정연 작가가 옮긴이의 말에서 밝힌 바다. 그의 말처럼 <섬광을 보았다> 속 두 작가의 서신 교환은 2019년 타계한 미국의 실험예술가 요나스 메카스의 작업과 닮아 있다. 여기서 요나스 메카스의 작업이란 그의 영화들, 그리고 그가 쓴 자칭 소설 <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이하 <레퀴엠>)을 포함한다. 우연히 찾은 컴퓨터 용지 한롤을 타자기에 끼워 쓴 <레퀴엠>엔 인과적 이음매가 갈수록 희미해진다. 정제된 생각보다 부유하는 의식에 가깝고, 긴밀한 연결보다 발산하는 산란에 가까운 그의 일기 영화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저 뱉어내는 듯한 이미지, 말의 연속에도 의식의 형식은 견고하다. “아, 단지 타이핑을 하는 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그냥 타이핑하고 타이핑하고 타이핑하면 되는데, 왜 작가들은 늘 무엇에 관해 쓰고 싶어 안달인지 모르겠다. (중략) 만약 당신이 작가라면, 그냥 써라, 내가 지금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냥 쓰거나 혹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냥 타이핑해라.” 바꿔 말하면 <섬광을 보았다>는 금정연, 정지돈 작가가 한국영화에 관해 말하려 안달하지 않고 그것에 대한 의식을 연신 타이핑하고 타이핑한 결과물에 가깝다. 그 기저 의식의 표면화를 통해 진정 그들이 느끼는 한국영화에의 진의를 엿보게 된다. <레퀴엠>과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 그리고 <섬광을 보았다>, 이어서 요나스 메카스와 두 작가 사이에 흐르는 묘한 공명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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