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영화평론은 죽었습니다.” 얼핏 위험할 수도, 성급할 수도 있는 말에 가늠키 어려운 신뢰가 실린다. 김종원 평론가라는 화자의 무게감 때문이다. 자타공인 대한민국의 1세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이며, 1965년에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출범시켰고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그의 말을 쉬이 흘려들을 순 없다. 11월22일,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저자와의 대화@KOFA’의 첫 주인공으로 나선 김종원 평론가는 10월 말 출간한 회고록 <시정신과 영화의 길>에 기반하여 구순을 앞둔 개인의 인생사를 펼쳤다. <시정신과 영화의 길>은 제1장 유년기, 제2장 소년기부터 제6장 노년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김종원 평론가라는 개인의 생애주기는 곧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장대한 문학사 및 영화사의 맥락과 진배없다. <자유만세> 등이 만들어졌던 해방 후의 한국영화사, 제주 4·3 사건의 전말, 50~60년대 한국 예술계의 산실이었던 명동 거리의 숱한 다방들, <영화잡지> <실버스크린> <영화예술> <씨네팬> 등의 초창기 영화잡지들, 유신정권의 탄압과 당대 영화 제작사들의 명운, 나아가 영화평론가의 사회적 입지를 공고히 했던 80년대, 공연윤리위원회(영상물등급위원회의 전신)에서 활동했던 십수년,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를 가름하려 지금도 연구 중인 연구가로서의 생애가 장장 600쪽에 걸쳐 서술된다.
“오늘날의 영화평론은 죽었다”
“제가 경쟁력을 갖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현장 비평이 아닙니다. 영화역사에 대한 치열한 도전입니다. 도전에 성과도 있었지만, 숱한 과오를 저질렀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종원 평론가는 “오늘날의 영화평론은 죽었다”란 어구에 위와 같은 말을 덧붙였다. 영화사에의 탐구를 포함한 문자의 평론이 쇠약해지고, 언어 혹은 구술 평론이 주류로 자리 잡은 현재를 진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를 비하하거나 비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죠. 되돌아보면 저의 시대는 대단히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봅니다.” 그의 말처럼 1980년대는 영화 저널리즘과 영화 비평의 전성기였다. 개별 영화에 대한 감상뿐 아니라 정책, 검열, 산업 등 영화계 전반에 대한 평론가들의 강한 의견 표출과 시론이 중요한 시절이었다.
입지가 높아진 영화평론가 중에서도 김종원 평론가의 위치는 남달랐다. 저자와의 대화의 진행을 맡은 한상언 영화사연구자는 “<한겨레>와 <조선일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신문에 영화평을 기고했고, 90년대에 연구가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당대 영화 연구자들의 공통된 은사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사회적 입지가 높아짐에 따라, 매스미디어와도 점차 친밀해졌다. “국내 4대 신문에 광고 모델로 나가고, 텔레비전에도 자주 출연했다”라는 그의 회상엔 모종의 부끄러움과 함께 속 깊은 우수가 느껴졌다. 이때의 명성을 바탕으로 그는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부산국제영화제 등 당시 터져나온 영화 축제들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며 영향력을 높였다. 1994년엔 오랜 영화 동료 이영일 영화평론가와 함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를 창설하기도 했다. “마치 영화평론가협회를 처음 꾸릴 때처럼 다방에서 그와 둘이 앉아 그의 생각을 구체화할 계획을 세웠다.” 대략 반세기 동안, 시대가 변할지라도 영화계에 파문을 던지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뚜렷하다.
이러한 부흥기에 대해 김종원 평론가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이러한 시대의 필요에 따른 것뿐이었다”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가 과거에 보여줬던 도전 정신만은 지금에도 유효해 보인다. 1959년 김종원 평론가가 세상에 내놓은 첫 영화 글의 제목은 ‘한국 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였다. 한국의 평론계를 “매스컴의 줄을 탄 시사평”, “매명화된 광고평”으로 나누고 “지엽적인 사이비 비평으로 타락”했다고 지적했다. 말미엔 “현대인의 고민과 한국인의 불안이 무엇이며 영화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분석하고 한국인의 불안과 고민의 해체 방법을 제시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비평가에게 있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영화계를 한바탕 흔들어보고 싶었던 마음, 한마디로 건방을 떨었던” 젊은 날 그의 치기가 현재의 평단에도 큰 자극을 안겼다.
시네마 천국
김종원 지음 | 한상언영화연구소 펴냄
<시네마 천국>은 35년 만에 내놓은 김종원 평론가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정신과 영화의 길> 발간에 맞추어 함께 발행됐다. 김종원 평론가는 애초 평론가, 연구가의 삶 이전에 시인으로 이력을 시작했다. 1952년 중학생 시절, 당대 유행했던 학생 월간지 <학원>에 <국화는 피어도>란 시를 발표하며 시의 행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남수, 조지훈, 박목월 등이 참여했던 <사상계>를 통해 1959년 본격적으로 시인에 등단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쌓인 그의 시 73편이 <시네마 천국>에 적혀 있다. 제1부 ’영화와의 헌사‘부터 제5부 ’바다와 여행‘까지 총 5개의 주제로 묶인 시집의 처음은 단행본 제목과 같은 <시네마 천국>이다. 그 시작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1. 뱃고동이 앗아간 망향의 부두도안개 낀 카사블랑카의 공항도노를 젓다 만 운하의 노천극장도불 꺼진 뒤엔 삭막하게 잠기지만
그것은 아주 꺼진 것이 아니다.새 날을 여는 축복의 불꽃처럼어둠 속에서 쓸쓸히 지켜본연인의 창문처럼그것은 정녕 닫힌 것이 아니다.(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