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중 감독의 <컨버세이션>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기차 칸에 앉은 승진(박종환)이 필재(곽민규)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장면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인물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이어지는 ‘대화’의 연쇄로 채워진 이 영화에서 혼자 남은 한 인물이 화면에 보이지 않는 다른 이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은 무척 특별한 감각으로 각인된다. 그런데 승진은 ‘슬프고 나쁜 편지’라고 적은 편지를 공책에서 찢어 두손으로 꼬깃꼬깃 접는다. 그 편지는 전달되지 않을 것만 같다. 어쩌면 편지를 쓰는 승진과 수신자인 필재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컨버세이션>은 그들의 전후 상황을 일일이 묘사하는 대신 도착하지 못한 편지를 매개로 작은 비밀을 공유한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한국영화의 이미지를 되돌아보면 편지를 쓰고 읽는 몸짓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한국영화, 특히 꽤 많은 독립영화를 보는 내내 여러 종류의 비밀이 담긴 타인의 편지를 훔쳐본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정도였다. <비밀의 언덕>에서 명은(문승아)은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적은 긴 편지를 산속 깊이 숨겨둔다. <너와 나>에서 세미(박혜수)는 하은(김시은)에게 말하지 못한 진심을 담은 편지를 전하려 한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명지(박하선)는 남편이 목숨을 걸고 구한 학생의 편지를 뒤늦게 읽는다. <희망의 요소>에서 아내는 집을 떠난 남편에게 편지를 쓴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에서 대학 교수인 주희(김주령)는 학생이 남겨두고 간 편지를 집어든다. 편지가 극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 양식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다큐멘터리인 <206: 사라지지 않는>은 2019년 세상을 떠난 김말해 할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다섯 번째 흉추>에서 매트리스에 피어난 곰팡이는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병실에서 죽은 여자가 전하지 못한 편지를 낭독한다. 글로 쓰인 편지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일정한 시차를 두고 타인에게 전달되는 목소리와 흔적을 비추는 <절해고도>와 <다음 소희>도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영화는 편지를 쓰고 읽는 몸짓을 통해 내밀한 곳에 기록된, 그러나 누구에게나 쉽게 전할 수 없는 정서와 낱말을 스크린에 새겨둔다.
현실에서라면 터무니없이 예스럽게 느껴지는 편지의 범람을 두고 몇 가지 단서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지는 <윤희에게>와 <벌새>가 큰 반향을 일으킨 이후로 어느덧 익숙한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 독립영화적 감수성의 증거물이라 말할 수 있다. 혹은 대화의 시차라고 할 것이 사라져버린 동시대적 환경 안에서 시차를 두고 형성되는 영화적 대화의 형식을 모색하는 수단으로 언급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단서가 있다. 편지를 주고받는 몸짓은 현실과 동떨어진 시대착오적 동작이라기보다 오히려 오늘날의 한국영화가 ‘현재형’의 장면을 의미 있게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어색함을 느끼기 때문에 발생하는 동시대적 증상이라는 의구심이 그것이다. 올해 한국영화에서 상대방과 직접 대면해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은 어딘가 낯설거나 회피되어야 하는 것처럼 다뤄진다. 이는 전쟁에 가까운 긴박한 현장을 통과하며 실시간 통신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면 ‘현재형’의 장면을 구성하지 못하는 몇몇 상업영화(<서울의 봄> <비공식작전> <더 문>)의 증상과 기묘한 비대칭을 형성한다. 한국영화의 화면에서 말은 너무 다급하거나, 너무 늦게 도착한다. 두 시간은 교통하지 않는다.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정우성)은 멀리 떨어진 군인들과 전화를 주고받으며 쿠데타를 막으려 하지만, 정작 전두광(황정민)과 직접 마주했을 때 의미 있는 말을 전하지 못한다(대신 그는 “너는 대한민국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어”라고 스크린 바깥을 향해 연설한다). 여기에서 대면은 어색한 형식으로 남겨져 있다. 이런 장면들에서 한국영화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대면’의 습관에 매몰된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