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의 적지 않은 대형 상업영화들이 군사정권의 자장 안으로 들어갔다. 1979년 신군부 세력은 전투에서 피아 구분하듯 내 편은 끔찍이 챙기면서 네 편은 절멸시킬 듯 갈라쳤다(<서울의 봄>).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추진과 지방 소권력이 인물들을 못살게 굴던 70년대(<밀수>), 당시 영화계에선 당국의 가위질이 당연한 일이었고 담당 공무원은 강력한 ‘갑’이었다(<거미집>).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행정 시스템 부재의 미 군정 치하(<1947 보스톤>), 그로부터 45년이나 지난 노태우 정권 말기에도 토호 세력을 중심으로 한 협잡과 음모는 법과 제도를 깡그리 무시해버렸다(<대외비>). 그땐 그랬다. 정부를 비판하면 음습한 콘크리트 건물로 끌려가 고문당했고 폭력배와 공무원이 어깨동무한 채 룸살롱에 들어가는 장면이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 시대가 2023년 한국 극장에 잇따라 소환됐다. 투쟁의 대상이 선명했던 시대를 회고하는 우리는, 어쩌면 지금 한결 불확실하고 은폐된 폭력에 둘러싸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인을 향한 만인의 무한 경쟁과 각자도생을 기본값으로 삼게 된 관객들이, 소수의 적에 맞서 다수가 연대했던 그 시절을 보며 떠올리는 것은 성찰일까 아니면 노스탤지어일까.
그땐 그랬다고 느끼는 우리가 그땐 저랬다고 여기는 경우도 여러 차례였다.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시스템 부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교섭>을 벌이는 한국 공무원들은, 인맥과 편법을 동원해 전두환 행정부의 주레바논 외교관을 구출하는 <비공식작전>에 나섰다. 특수폭행과 약취·유인이 횡행해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 필리핀 뒷골목에서 <귀공자>가 납치당했고, 올해 사실상 해외 촬영을 쉬었지만 지난해 베트남을 거쳐 내년엔 필리핀으로 지정된 연쇄적 범죄 공간은 말 그대로 <범죄도시>의 연속이다. 2020년 이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태국, <늑대사냥>의 필리핀 등 한국 범죄 액션 촬영지는 눈에 띄게 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개발도상국·저개발국에 집중됐다. 군사정권 시절 겪었던 우리의 과거가 여러 측면에서 되풀이되는 저들 장소에서, 한국영화 제작진이 필요로 하는 것이 폭력과 야만의 구현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협잡과 음모, 인맥을 동원해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이야기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군사정권 시절과 <카지노> 시리즈의 필리핀에서 공히 펼쳐진 바 있다. 이들의 공통분모도 주연배우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 한국영화에 군사정권 시대와 개발도상국 로케이션이 집중되고 있는 흐름은, 그래서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줄기로 볼 필요가 크다.
군사정권에 맞서 절차적 민주화를 이룬 한국은 아직까지도 분열 정치에 볼모 잡힌 채 실질적 민주주의 모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맞닥뜨린 양극화와 기후 위기는 일정 연령대 이하 세대에 미래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출생률 최저, 자살률 최고의 사회에서 주류 기득권 세력은 새로운 시대를 설계할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수 한국인들이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워하는 시대에 영화는 어디를 비추는가. 과거 또는 과거가 보이는 곳만을 비출 때, 영화는 노스탤지어로 포장된 도피처로 전락할 위험에 빠진다. 2023년 다수의 한국영화를 출발시킨 시공간 배경이 관객에게 건너와 어느 곳에 도착할지 걱정되는 것은 그래서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 이익만 바라보다 뜻을 잊다)다. 한국 상업영화계가 곱씹어볼 말이다. 이를 차용해 한국영화의 서사를 두고 ‘견작망래’(見昨忘來, 지난날만 바라보다 앞날을 보지 못하다)라는 말을 지어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