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열린 ‘영화롭고 드라마틱한 CJ의 밤’ 행사에서 CJ ENM은 글로벌 진출과 한국영화 투자 의지를 모두 강조하며 “CJ ENM이 영화사업을 그만둔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일축한 바 있다. 실제로 CJ ENM이 들려준 올해 계획은 <기생충>으로 정점을 찍은 영화 명가로서 입지를 다시 견고히 하겠다는 확고한 야심을 보여준다.
- 지난해 <씨네21>이 투자배급사 투자책임자들을 만나는 기획 기사를 준비할 당시 CJ ENM은 한국영화 투자를 담당하는 사업부장이 공석인 관계로 참석하지 못했다. 2022년과 2023년을 돌아보면 어떤가.
= 2022년 <헤어질 결심> <브로커>는 해외에서 좋은 성과를 얻었고 흥행 면에서 <공조2: 인터내셔날> <영웅>이 1, 3루타 정도의 실적을 냈지만 전체적인 성적은 부진했다. 대부분 코로나19 이전에 기획된 영화들이었다. 팬데믹 이후 시장이 빠르게 변하고 개봉이 지연되면서 트렌드에 뒤처진 것은 물론 관객이 원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찾지 못했던 게 아닐까 반성하고 있다. 또 코로나19 종식 이후 야외 활동 증가 등 변화가 관객 모수를 감소시켰다거나, 2010년대 말 영화시장이 과열되고 투자 자본이 쏠리면서 형성된 경쟁 구도가 오히려 퀄리티에 영향을 미치는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반면 해외 사업은 2022~23년 회복세에 접어들면서 상당히 양호한 성적을 거뒀다. 터키, 베트남 지역의 실적이 좋았고 미국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큰 진전이 있었다.
- 앞으로 선보일 영화들은 달라진 산업 환경을 반영할 수밖에 없겠다.
= 기존의 CJ ENM이 극장 영화 중심으로 오랫동안 사업을 해왔다면 지금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맞춰 콘텐츠를 생산해야 한다. 소비자 동선, 미디어 소비 경향, 새로운 매체의 확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콘텐츠의 내용과 형식, 유통 방식을 결정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극장에 최적화된 콘텐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탐구해야 한다.
- <올빼미>에 이어 <서울의 봄> 역시 비수기에 개봉해서 흥행에 성공했다. 성수기와 비성수기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장에서는 기존의 배급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 <외계+인> 2부가 1월10일 개봉한 것도 그 영향인가.
= 과거에는 여름, 겨울 성수기에 많은 관을 확보해 개봉 초반 흥행 몰이를 한 후 입소문으로 이어지는 톱다운 모델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관객이 재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의 소스와 타깃층을 분석한 뒤 그에 맞는 개봉 시기, 공개 방식, 플랫폼 등을 역으로 찾아내야 한다. 예전이었다면 <외계+인> 2부 정도 사이즈의 영화는 당연히 성수기 한가운데 개봉했을 것이다. OTT 공개작과도 경쟁해야 하는 시대에는 오히려 굵직한 콘텐츠가 몰리는 성수기에 소비자에게 개봉작 정보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외계+인> 2부는 관객이 영화를 찾아올 만한, 차분히 볼 수 있는 시기를 찾았다고 보시면 된다.
- ATL(Above The Line, TV, 신문, 라디오 등 전통 매체를 활용한 광고) 중심의 매스 마케팅에서 SNS를 중심으로 한 입소문 전략으로 홍보 방식도 달라졌다.
= 요즘 사람들은 리니어TV(방송 스케줄이 정해진 TV 방송)를 거의 보지 않는다. 인스타그램, 틱톡 등에서 일정 수 이상의 팬덤이나 인지도가 확보되고 알고리즘을 형성한다면 관련 없는 사람에게도 전달될 수 있는 폭발력이 생긴다. 그렇게 10~20대 관객층 사이에서 화력이 붙어야 윗세대에게도 입소문이 전해진다. 톱다운 방식의 일방적인 푸시보다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응원이 나올 수 있도록 바텀업 마케팅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콘텐츠 기획 단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 자회사 CJ 스튜디어스, 스튜디오드래곤과의 협업 구조는 어떤 청사진을 위한 것인가.
= 영화감독들을 중심으로 한 CJ 스튜디어스가 영화계의 자산을 활용한 집단 스튜디오라면, 스튜디오드래곤에는 작가와 PD 혹은 크리에이터들을 중심으로 한 방송 업계 리소스가 있다. CJ ENM 영화사업부는 영화계 전반의 네트워크를 통해 콘텐츠 성격에 맞는 협업 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2시간짜리 극장 영화가 되느냐, 6~8부작 시리즈가 되느냐가 결정된다.
- 올해 CJ ENM이 선보일 영화들을 소개해 달라.=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와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은 흥행성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는 야심이 있는 영화들이다. 이런 영화들이 잘돼서 양질의 작품이 계속 나올 수 있는 구조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 <하얼빈>은 시공간적 측면에서 영화의 원형으로 돌아가 숏 하나하나를 고심해서 찍었기 때문에 극장에서 봐야만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베테랑2> 역시 액티브한 액션을 시청각적으로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극장 관람이 필수다. 이상근 감독의 <2시의 데이트>는 기발한 컨셉과 애착 가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귀여운 작품이다. 개봉 초반 열렬한 팬덤을 모을 수 있다면 흥행 면에서 좋은 성과를 얻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설 연휴 개봉할 <도그데이즈>는 웃음과 감동을 모두 주는 휴먼 드라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착한 영화다. 아카데미 시상식 시즌에 맞춰 3월쯤 <패스트 라이브즈>를 개봉하려 한다.
- <패스트 라이브즈>는 <설국열차> 이후 CJ ENM이 할리우드영화를 투자, 배급한 중요한 사례로 남을 듯하다. 어떻게 성사된 프로젝트인가.
= <기생충> 오스카 캠페인을 할 때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한국영화의 퀄리티와 제작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은 상업영화 진영에서 진정한 시네마를 유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제 볼만한 영화는 한국에서만 만들어진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때부터 한국영화계가 쌓아온 자산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러 기획을 고민하고 있던 차에 홍콩국제영화제에서 A24를 만났다. 북미 시장 중심으로 강한 팬덤을 가진 A24와 아시아 시장에서 존재감 있는 CJ ENM이 만나면 상호보완적인 협업이 가능하겠더라. 그들과 협업한 첫 프로젝트가 <패스트 라이브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멀티컬처럴리즘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언어화되지 않는 아시아적 정서를 영화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치열함과 야심이 시나리오에서부터 느껴져서 신선했고 보편적인 호소력까지 갖출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 밖의 다른 메이저 스튜디오나 A급 파트너들과 함께 준비 중인 몇개의 영화가 올해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