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모르게 골목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여자. 흰 원피스에 검고 긴 머리. 외형부터 섬뜩한 이 여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한테 시간이 없어요. 지금 좀 추운데. 집이 가깝다고 했죠?” 상대방의 물음에 답하기보다 일방적인 질문을 더 많이 건네고, 자신에 관한 정보는 쉽게 내어주지 않는 지영은 배우 김설현을 만나 완전한 구체성을 갖는다. 호러적 장르성, 인간성을 소생시키는 역동적인 이야기,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밀과 진실의 조우. <조명가게>를 구성하는 주요 키워드는 모두 김설현을 교집합으로 두고 있다. 어둡고 서글픈 세계관을 가로지르는 김설현은 그만큼의 용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 지영과 현민(엄태구)이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는 1화 첫 장면은 <조명가게>의 공포감을 처음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장면에서 어떤 점을 드러내고 싶었나.
=처음엔 지영이라는 캐릭터가 조금 어려웠다. 극 안에서 지영이 지닌 목표점이 있는데 정서를 담는 동시에 드라마적 톤을 유지해야 하는 게 큰 숙제처럼 느껴졌다. 지영이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어야 하는 나름의 사정과 감정이 있다. 그런데 첫 장면을 통해 무서움을 증폭시켜야 해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 헷갈리더라. 그래서 촬영도 두 가지 버전으로 진행했다. 정서에 집중한 버전 하나, 호러적 이미지를 내세운 버전 하나. 후자에서는 조명이나 고개 드는 각도처럼 촬영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 흰 옷에 검고 긴 머리. 클래식한 공포심을 자극하는 인상이다. 장르적으로 분장과 의상에도 신경 쓴 듯하다.
=<조명가게> 합류를 결정하고 배우 선배님들을 한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주지훈 선배님이 농담을 건네셨다. “설현이가 무서울까? 안 무서울 것 같아.” (웃음) 그래서 진짜 무섭게 보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지영이는 손 분장이 중요한데, 그 손톱이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떨어진다. 손 분장을 한 날이면 물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었다. 옷을 입거나 벗지도 못해서 패딩을 위에 걸치고만 있었다.
- 지영을 드러내기 위해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를 활용했다. 김설현 배우에게서 지금까지 자주 볼 수 없던 모습이기도 한데.
=맨 처음 내가 생각한 지영이는 저음이 어울릴 것 같아 그렇게 준비해갔는데 김희원 감독님이 “정서보다 톤이 앞서 있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내 본래의 자연스러운 말투로 수정했는데 테스트 촬영 뒤에 다시 톤을 낮추는 게 좋겠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목소리를 어느 정도로 내릴지, 어투를 어떻게 살릴지 세세하게 감독님과 의논했다.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에는 강풀 작가님이 오셔서 “지영이가 지쳐 보이면 좋겠다”고 하셨다. 모든 그림이 전반적으로 디테일하고 명확해서 정확하게 반영하고 싶었다.
- 지영은 현주(신은수), 지웅(김기해)과도 호흡을 맞춘다. 각자 사연이 있는 10대 청소년 현주와 지웅 사이에서 지영이 어떻게 다르게 보여지길 바랐나.
=항상 혼자 있는 지웅이와 엄마와 함께하는 현주. 지영이에겐 상대가 혼자인지 혹은 누군가와 함께 있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이 조건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려고 했다. 지웅을 처음 만난 순간 “너 여기에 혼자 왔어?” 하고 질문을 하는 것도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 작품에선 내내 젖어 있는 상태다. 체온을 유지하는 게 무척 중요한 문제였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촬영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식을 찾았는지.
=못 찾았다. (웃음) 그냥 버티고 해내는 것만이 답이란 생각이 든다. 촬영 기간이 1월, 한겨울이었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이가 다다다다 부딪혔다. 와중에 나만의 노하우를 발견했다. 슛 들어가기 전에 온몸에 힘을 꾹 주고 있다가 풀면 잠시 턱 떨리는 게 멈춘다. 그럼 그때 바짝 촬영하고 또 몸에 힘을 주다가 촬영하는 방식으로 이어갔다. 어떤 장면에서는 추위가 하도 극심해서 우비를 입기도 했다. 원래 우비 모자만큼은 안 쓰려 했는데 김희원 감독님이 “안돼, 너 진짜 모자 써야 돼. 이젠 안돼” 하시더라. 배우의 상황과 컨디션을 섬세하게 챙겨주셨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젖어 있는 게 힘들긴 하지만 연기를 고민하는 게 더 급급하기 때문에 춥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연기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
- 공개된 4화 이후에 더 역동적인 감정선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희원 감독의 디렉션으로 힘을 받은 부분이 있다면.
=감독님은 연기 디자인을 많이 가르쳐주셨다. 어떤 지점에서 목소리를 더 크게 낼지, 앵글이나 동선을 어떻게 부각할지 등 연기를 구상하는 방식에 대해 배웠다. 또 하루는 지영의 복잡다단한 감정선에 관해 이런 말씀을 주셨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참을 수밖에 없을 때 더 슬픈 것 같다고. 꾸욱 눌렀다가 팡 터뜨리는 감정적 도화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말씀을 체화하려 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내가 지금 맞게 가고 있는지 의심이 드는 날이면 감독님에게 많이 기댔다. 연기라는 건 하는 사람이 느끼는 것보다 보는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가 더 중요한 예술이라 생각한다. 계속해서 내가 어떻게 보여질지 신경 쓰면서 연기하기 때문에 숲을 보는 감독님의 눈과 판단을 믿게 된다.
- <조명가게>는 많은 등장인물의 여러 사연이 한데 뒤엉키는 형식이다. 시청자는 많은 배우를 한꺼번에 볼 수 있어 재미있지만 배우의 입장에서는 분절된 조각을 나눠 가져야 해서 나름의 고충도 있을 것 같다. 이러한 포맷이 지닌 즐거움과 어려움을 말해본다면.
=사실 좋았다. 걱정이 덜어진다고 해야 하나. 혼자였으면 부담처럼 받아들여질 것들도 다른 좋은 배우들과 함께하면서 우리 모두가 만들어나가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많이 배웠다. 무엇보다 <조명가게>는 여러 관계에서 비롯된 마음과 감정을 다루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우리의 주제가 완성되기 적합한 포맷이었다.
- 개인적으로 배우 김설현이 좋아하는 공포물 소재가 있다면.
=평소에 공포물을 잘 못 본다. 긴장감에 온몸이 경직돼서 다음날 근육통이 올 지경이다. (웃음) <조명가게>에서도 선해(김민하)가 머리를 감은 뒤 배수구에서 긴 머리카락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는데, 어느 날부턴가 내 머리가 이렇게 길었나 싶더라. 너무 소름끼쳤다! 그래도 꼽아보자면 <곡성> <엑소시스트> 같은 오컬트. 이런 건 판타지적이기도 하고 배우들의 폭넓은 연기를 볼 수 있어서 좋다. 올해에도 <파묘>를 재미있게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