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가게>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은 저마다 슬픔을 안고 있다. 한명 한명 압축된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시적이다.” 정체를 도통 알 수 없는, 그러나 어쩐지 마음이 쓰이는 지영(김설현)에 흔들리는 현민을 그리기 위해 배우 엄태구는 그가 감각한 상황에 초점을 맞췄다. 에피소드별로 나뉜 모든 감정을 납득하기보다 현민이 당장 직면한 현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움켜쥐어온 애수에 집중하길 선택한 것이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 스산한 버스 정류장 시퀀스는 호러물로서 <조명가게>를 정체화하는 장면이지만 추위와 외로움에 떨고 있는 여자를 외면하지 않는 현민의 따스함이 전달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 아무리 날이 바뀌어도 현민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지영을 계속 마주친다. 1화 첫 장면부터 음산하고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극 중에서 나흘의 시간이 흐른다. 며칠 동안 퇴근길에서 지영을 만난 현민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보이도록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튀는 것 없이 그대로 연결되도록. 현장에서도 김희원 감독님이 디렉션을 주셨다. 내가 조금이라도 지영의 답변에 망설이거나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여백을 최대한 줄이고 빠르게 프레임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타이밍 계산을 짚어주셨다. 정확한 타이밍이 중요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뒷문에 살짝 부딪히는 것도 리허설을 통해 타이밍을 맞췄기 때문에 가능했던 장면이다.
- 이 장면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부분이 있다. 나흘 내내 착장이 바뀌지 않는다.
=빨간 셔츠여서 더 눈에 띄는 것 같다. (웃음) 그런데 이건 일부러 의도한 거다. 빨간색이어야 했던 이유도, 현민이 옷을 갈아입지 않은 이유도 있다. 모든 요소가 작품을 관통하며 촘촘히 연결된다.
- 지영과 대화하는 동안 평소보다 경쾌하고 높은 톤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현실적으로 친근한 톤이지만 장르물에서 너무 붕 떠 보이지 않게 조정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톤을 따로 계산하거나 염두에 두진 않았다. 평소보다 높은 톤이지만 대본에 현민의 상황과 감정 그리고 지영에 대한 리액션이 잘 나와 있어서 그것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체화하려 했다. 현민의 이야기는 4화 뒤편에 좀더 자세하게 펼쳐진다. 그가 처한 상황과 그가 느낄 감정을 적확하게 전달하고 싶어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오래 나눴다.
- <조명가게>만이 자아내는 공포에는 어떤 차별점이 있다고 판단했나.
=일차원적으로 공포만 있는 게 아니라 저 먼 심연의 인간의 정서를 말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것을 슬픔으로도 공포로도 느낄 수 있는 복합적인 구조가 <조명가게>만이 지닌 특징이다.
- 김희원 감독의 첫 연출작이다. 가장 오래 논의한 지점이 있다면. 감독이라는 자리에 배우 김희원의 경험에서 추출되는 이점도 있을 텐데.
=<조명가게>는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 중에서 감독님과 가장 이야기를 오랫동안 많이 나눈 작품이다. 현민의 표정부터 행동 하나하나의 작은 것들도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 있어서 상세하고 섬세하게 작업했다. 현장에 가서는 100% 김희원 감독님의 디렉션에 의지하며 수행했다. 주로 함께 촬영한 김설현 배우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이 순간순간 드러난다. 김희원 감독님이 배우의 이면을 끄집어내고 포착하는 데 엄청 공들인 느낌이었다. 많은 분들이 그 표정에 놀라고 좋아하실 것 같다.
- 김희원 감독에 대한 두터운 신뢰가 느껴진다.=현장에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그가 배우라는 사실을 까먹을 정도로 우리의 선장으로서 존재했다. <조명가게>에도 엄청 골몰하며 빠져 있고 무엇보다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나노 단위로 나누어 말씀하시는 디렉션들도 직접 연기를 선보이며 설명해주셨다. 모든 순간에 의미와 의도가 담겨 있던 현장이었다. 그가 만들어둔 길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 4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현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비밀이 공개된다. 이때 병동에 누워 있는 장면을 촬영해야 했는데 어땠나. 흩어져 있던 배우들을 함께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많은 배우들을 만날 생각에 그전부터 너무 설렜다. 극 중에서 유일하게 부담 없는 촬영이기도 했고. 큰 어려움 없이 편안히 촬영할 수 있었다. 병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되니까. (웃음)
- 현민의 집은 심리적으로 공포스러움을 자아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둡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돈다.
=현민의 집은 사실 작은 세트장이 아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작업했던 몇몇 스태프들이 모여 아파트 단지 세트를 세웠다. 3층 높이까지 건물을 지어서 아파트 복도부터 엘리베이터까지 모두 세트장에 포함된다. 그래서 아파트 전경이나 비 내리는 장면 등을 비교적 순조롭게 촬영할 수 있었다.
- 연기란 게 명확한 답이 있는 일은 아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 어떻게 자신을 돌아보려 하나.
=무조건 감독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프레임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니터를 많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사실 촬영장에서는 모니터를 보는 시간이 길게 주어지진 않는다. 이미 촬영 시간이 끝나고, 현장 세팅이 바뀌는 동안 아주 잠깐 모니터를 조용히 볼 수 있다. 이미 기회는 지나갔는데 모니터 속 내 모습이 아쉬운 순간들도 분명 있다. 그럴 땐 그냥 합리화하며 넘겨버린다. (웃음) 분명 괜찮은 순간도 있었어! 누군가가 의미를 찾아줄 거야! 하면서. 내가 한 일의 속상함을 받아들이는 것도 배우의 일이다.
- 평소에도 공포물을 즐겨보는 편인가.=전혀. 아무리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도, 아무리 좋아하는 감독이 연출해도 못 본다. 몸도 마음도 힘드니까. 지금 혼자 살기 때문에 더 무섭다. 절대 못 본다. <조명가게>처럼 대본 자체가 호러물인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시나리오를 다 읽고 나서 샤워할 때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세수를 하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거울 너머에 비친 내 모습이 나를 바라보면 어떡하지?